『저 바다 앞에 서면, 궁극적으로는 내가 실패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제주 출신의 소설가 현기영(58)씨는 제주바다 앞에 서면 그간의 서울생활이란 부질없이 허비해버린 세월처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틈만 나면 귀향연습을 한다. 자신이 탯줄을 묻은 땅에 다시 돌아가 묻혔을 때, 그 자연과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탄생은 우연이었지만 죽음은 필연』이라는 생각이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 발행)는 그가 5년만에 발표한 신작이자 1930년대 제주잠녀투쟁을 그렸던 「바람타는 섬」 이후 10년만에 쓴 장편이다. 그의 나이 일곱살 때 일어난 불길, 고향인 제주시 변두리 중산간지역 노형리를 송두리째 태워버려 폐허로 만들었던 1948년 4·3사건의 불길이 지배했던 그의 기존 작품세계와는 획을 긋는 작품이다. 그 폐허와도 같은 망각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길어올린 성장소설이다.
우리 문학에도 많은 성장소설이 있다. 하지만 현씨의 「지상에 …」는 우리 모두가 너무도 까맣게 잊고 있는 유년시절 체험의 풍요로운 재현, 자연과 하나되었던 성장과정의 섬세한 묘사, 무엇보다 이 모두를 작가가 삶에 대한 깊은 통찰로 갈무리했다는 점에서 강물속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작품이다.
지금은 지도상에도 존재하지 않는 제주도 함박이굴 마을에서 태어나서부터 중학교 졸업기념 「맥베스」연극공연까지의 시기를 소설은 다룬다. 『어미 몸에서 갓 나온 송아지가 곧 와들랑 몸을 일으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마치 대지의 분출로 송아지가 탄생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작가의 어린 시절은 곧 자연과 하나인 시간이었다. 만 네 살이 되도록 침을 흘리고 다니는 통에 진짜 돼지코를 잘라 부적처럼 목에 걸고 다니던 아이, 용두암 옆 용연 앞바다에서 「몸에는 지느러미 돋고 입에는 아가미가 난듯」 헤엄치며 놀다 어머니가 옷을 가져간 줄도 모르고 여자아이들이 볼세라 불알만 잡고 뛰던 소년, 아버지의 부재에 이상(李箱)과 카뮈를 빌미삼아 반항하던 학창시절. 적어도 30대 이후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기억할 시절이다. 제주인만이 겪었던 「언어절(言語絶)의 참사」 4·3사건의 기억도 물론 있다.
이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하루 세 갑씩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는 현씨는 『유년시절을 다시 살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머릿속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그 시절의 영상을 잇기 위해 틈만 나면 제주도를 찾아 맨발로 바닷가 바위 위를 걷기도 하고,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졸라 옛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는 『자연의 일부였으므로 부끄럼없고 무구했던 시절, 나에게는 그 시절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세월은 모두 거짓처럼 느껴집니다』고 말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작가 후기
“늦가을 햇빛이 서울의 내 집 베란다에 따스하게 비칠 때면, 으레 고향 옛집의 마당에 멍석 깔고 노란 햇좁쌀을 널어 말리던 일이 생각나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 햇볕을 허비하는 것이 너무 아까워 시장에서 표고버섯이나 가지나물이라도 사다가 말려야 겨우 불편한 마음이 누그러든다. 인간성장의 방정식에는 변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항수가 내부에 있게 마련이다. 생성 최초의 것, 그 고장의 풍토가 만들어놓은 깊은 속의 단단한 씨, 그 무엇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본질적인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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