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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신간회... 좌우연합불구 현실벽 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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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신간회... 좌우연합불구 현실벽 막혀

입력
1999.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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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는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힘을 합쳐 공개적으로 활동한 거의 유일한 단체다. 따라서 좌우세력의 연합, 민족역량의 결집 차원에서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230여 부(府)·군(郡)의 반 수 이상인 120여 곳에 지회가 설치되고 회원수만 3만여 명을 자랑하던 신간회. 신간회는 실로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였다.그러나 신간회는 1927년 2월 창립 이후 1년여 기간을 빼놓고는 그리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구나 출범 4년 4개월만인 1931년 5월, 일제의 탄압을 자초하는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다. 창립기에 선풍을 일으키며 조직을 확대하던 단체가 왜 스스로 해체하게 되었을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해묵은 갈등이 재연된 것이라고만 보아 넘길 수 있을까. 신간회 창립과 해소의 실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국내민족운동이 직면했던 「정치운동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신간회는 좌우세력이 연합했다고 하지만, 「통일전선운동」이나 민족운동의 대동단결 같은 당위적 명제만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분립의 골을 메우지 못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일부 세력이 이해를 맞추어 신간회를 출범시킨 데는 「조선의 자치제 실현 가능성」이라는 독특한 상황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이 조선자치설이 국내 민족운동진영에 「정치운동론」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던졌고 이후 10여 년 간 혼탁한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일제강점기 정치운동이라는 것은 처음 친일운동이라는 의미와 거의 같았다. 비타협적인 독립의지를 가지고 일제의 식민통치를 전면 부인하는 것만이 3·1운동 이후 민족운동가들과 대중들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명분과 지조는 지켜주었다. 하지만 일제의 직접통치 아래서 대중을 동원한 운동을 비타협적으로 펼쳐나갈 여지는 자꾸 좁아만 갔다. 정치적 출구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친일이라는 비판을 막을 수가 없었다. 반면 일제가 허용하는 정치 공간이라도 활용하기에 따라선 운동 발전에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딜레마였다. 일제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일제로부터 정치적 공간을 확보해내는 것. 이러한 고민은 조선자치설이 점점 유력해지면서 급박한 결단을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조야 정치인 일부는 실제로 조선자치제 실시를 검토하고 있었다. 자치제 실시를 통한 일제의 노림수는 민족독립운동의 분열과 순화였다. 그리고 일본의 첫 보통선거 실시 예정과 일본의 사회주의세력들이 강력하게 전개한 합법적인 의회진출운동도 조선자치설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정치정세가 변하면 조선에 대한 직접통치방식도 바뀔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일제에 놀아나지 않으면서 정치적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다. 그것은 「정치운동」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정치운동을 수행할 일종의 정당형태를 갖춘 공식적 민족대표기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많은 민족주의·사회주의 진영의 세력들은 자신의 주도권 아래 그러한 기관을 만들기 위해 경쟁적으로 합종연횡을 시도했다. 유일한 결과물이 이른바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과 당시 정치투쟁론을 표방한 제3차 조선공산당의 사회주의자들이 결합한 신간회였다.

신간회를 만든 두 세력은 처음부터 신간회를 통한 운동의 방향과 성격을 달리 설정하고 있었다. 「정치운동」에 대한 시각 차이 때문이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은 조선자치제 실시 가능성을 보면서 그 때에 대비한 조직의 준비를 우선했다. 타협적 공간 안에서 비타협적투쟁을 생각한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모순된 노선이었다. 반면 사회주의세력은 정치적 공간이 마련된다면 이를 극단으로 활용하여 무산정당운동의 전개를 꿈꾸었다. 그들은 투쟁적일 수는 있었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1928년에 상황은 일변했다. 1년이나 연기되어 실시된 총선거에서 일본 정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정세는 반동으로 치달았다. 일본의 무산정당운동은 탄압을 받아 합법적 정치투쟁론을 버리기 시작했다. 조선자치제설도 따라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신간회의 사회주의자들도 합법적 무산정당노선의 비현실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활동할 여지도 없는 상황이 되자 신간회 민족주의자들의 비타협적 투쟁론도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신간회의 활동은 급격히 침체에 빠져들었다. 신간회의 민족주의자들은 계몽운동단체로 자신들의 활동 위상을 낮추었다. 민족주의자들은 1년반의 침체기를 지나 민중운동사건을 일으키지만 조직만 타격을 받았다. 1930년부터 더 이상 비타협적 운동론만 지키고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현실주의 운동노선으로 더 기울어갔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다시 대두하던 조선자치제설의 유포와 더불어 신간회가 자치설에 경도되었다는 오해와 반발을 광범하게 불러 일으켰다. 정치운동 공간의 활용문제는 민족운동진영에서 다시 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서 점차 커지고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은 전세계적으로 극단적인 투쟁전술을 취해가고 있었다. 민족주의세력과의 어떠한 결합도 운동의 타락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국내의 사회주의진영을 휩쓸었다. 일본에서는 그나마 존재했던 계급연합적 무산정당을 순수한 계급적 정당으로 해소, 비합법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운동론이 대두했다. 국내의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크게 영향받고 있었다. 그들은 1931년에 들어서자 신간회 해소론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신간회를 계급적 투쟁목표를 선명히 한 조직으로 탈바꿈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해체운동이 아니라 해소운동이라고 했다. 신간회 창립대회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 전국대회에서 해소론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대회가 되었다. 일제는 신간회 해소 결의가 내려지는 순간, 해소는 해체와 같다며 신간회의 활동을 금지시켜 버렸다.

*신간회 인물들 그이후

신간회 창립과 활동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가릴 것 없이 이후 양진영의 주류로 남은 인물이 거의 없다. 신간회의 실상과 내막이 제대로 남겨지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해방 후 양 진영의 주류는 모두 신간회를 비판했던 사람들이었다. 쟁쟁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진영을 떠나거나 고립되어 있다가 죽은 경우가 많다. 민족주의자들은 알려진 것처럼 사회주의자들과 사상적 친화성을 갖는 중도 또는 중도좌파적 인물이라기보다 본질에서 우익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신간회의 사회주의자들 안광천은 조선공산주의운동의 방향전환론을 주장, 신간회 성립을 가능케 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신간회를 시종일관 이용하는 것만 생각하다가 끝내는 신간회를 그리 가치있게 여기지도 않았다. 신간회 해소(解消) 이후 중국에서 활동했지만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고립되었다.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정확히 알려져 있지 못하다.

권태석은 서울계 공산주의자의 대표. 해방 후에는 안재홍과 어울리거나 김구의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48년 객사했다. 한위건은 매우 투쟁적인 공산주의자였다. 신간회 활동에 적극적이었지만 이후 신간회 해소론을 선도했다. 중국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사망했다. 아리랑의 김산을 괴롭힌 인물로도 유명하다.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허헌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공산주의자들과 친분이 두터워 그들과 계속 행동을 같이 한 사람. 해방 후에도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움직인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냈다.

김준연은 신간회 창립위원이면서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공산주의자. 하지만 1930년대 출옥한 후 민족주의진영에 가담했다. 해방후에는 한민당과 민주당에서 활동하면서 극우적 경향을 노골화했다. 법무부장관을 지냈고 5선 국회의원이었다.

■신간회의 민족주의자들 홍명희는 신간회 탄생의 실질적인 산파. 조선공산당의 비밀당원이라는 증언이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 정서를 지닌 인물이다. 일제말 친일을 거부한 몇 안 된 인물들 중 하나다. 해방 후 중도파적 입장을 취하다가 월북해 북한 부수상까지 지냈다.

안재홍은 신간회 민족주의자 최대의 스피커. 일제강점기때부터 이승만의 국내 조직인 흥업구락부의 핵심인물이었지만 해방 후 이승만 세력에 따돌림 당했다. 본령이 우익이면서도 우익 세력들로부터 항상 고립되었던 기구한 인물. 한국전쟁 때 납북돼 북에서 죽었다.

김병로는 청렴과 지조, 민주주의를 신봉했던 합리적 우익. 일제 말 친일하지 않았으며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이종린은 신간회 민족주의세력의 한 축인 천도교 구파의 대표 인물이다. 신간회 기간에 자치론자들과 비타협적으로 싸웠지만, 일제 말 엉뚱하게도 극도의 친일행각을 벌였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에 가담,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납북됐다. 이밖에 신석우(초대 주중대사), 이순탁(초대 기획처장), 명제세(초대 심계원장)도 신간회에 참여한 인사들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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