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37)과 유하(36). 90년대적 상상력과 감수성의 극점을 보여주었던 소설가 장정일과 시인 유하가 각각 오랜 공백을 깨고 신작을 발표했다. 「오늘의 작가는 아파트든 자동차든 대중들이 욕망하는 것을 똑같이 욕망한다. 그러니 대중들의 욕망을 똑같이 모방해놓은, 욕망의 순도가 떨어지는 한국소설은 보나마나한 것이다」(장정일), 「사람이 아니라 시가 시를 사랑하고, 시가 시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시가 시에 취할 그날이 우리 앞에 오고 있다」(유하). 두 사람은 공히 세기말 한국소설과 시에 대한 비판적 자의식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장정일
장정일씨는 외설 시비를 일으켰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이후 2년반만에 장편 「보트 하우스」(산정미디어 발행)를 발표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나는」이다. 그는 바로 작가 장정일 자신이다. 「내게 …」때문에 구치소에 들어갔다가 보석으로 나온 그는 스스로를 「양계장의 닭」이라 느낀다. 밤낮없이 불켜진 양계장의 닭처럼, 죽을 때까지 자기가 뭐하는 놈인지도 진짜 모르면서 알을 낳듯 글을 써야 하는 소설가. 그는 노트북컴퓨터 두 대를 부숴버리고 타자기가 있다면 진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자기는 장씨가 첫 소설 「아담이 눈뜰 때」에서 썼던 그 선언과도 같은 구절,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에 나오는 그 타자기다. 이 클로버727 타자기를 구하기 위해 수소문하던 그에게 「이주민」이라는 열아홉살 소녀가 찾아오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타자기를 찾는 모험의 과정이 환상, 소설과 현실을 오가며 기발한 스토리로 전개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하는 그레고르 잠자처럼 이주민이 타자기로 변하고 살인과 추적, 초능력과 마법, 유령소동까지 펼쳐진다.
기존 자신의 소설의 주제가 되었던 인생유전의 드라마를 장씨는 「보트 하우스」에서 종횡무진 펼쳐놓고 있는 셈이다. 재기있는 문체는 여전하다. 그는 요즘은 대구 집에 칩거하며 클래식 레코드를 듣고 모으며 살고 있다. 『듣는 음악에 따라서 소설이 달라진다. 「아담이 눈뜰 때」가 록,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가 재즈에서 영감받은 작품이었다면 이제 나는 클래식에 입문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유하
유하씨가 4년만에 낸 전작시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열림원 발행)는 그의 기왕의 시집들과는 많이 다르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 보여주었던 도시문명 비판에 기초한 대중문화적 상상력, 이른바 「무협지적 상상력」은 거의 사라졌다. 유씨는 『대중문화에 대해 쓸 시들은 다 써버렸다』고 말했다. 『이제 무기교로, 시를 만들지 않고, 「원초적 떨림」이라 할 수 있는 시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시크리드라는 이름의 물고기는/갓 부화한 새끼들을 제 입 속에 넣어 기른다/사람들아 응시하라/삼킬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머금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눈물을 머금은 눈동자/이슬을 머금은 풀잎/봄비를 머금은 나무/그리고 끝내 삼킬 수 없는 노래의 목젖,/나도 한 세상/그곳에 살다 가리라」(「삼킬 수 없는 노래」중) 같은 구절이 그가 말하는 「초심」을 보여준다.
그 초심의 회복은 상상력의 회복에 달려있다. 그는 「인생의 일할을/나는 학교에서 배웠지/그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데/가장 도움을 준 것은/그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최대한 굴복시키는 법」(「학교에서 배운 것」중)이라고 돌이킨다. 그러나 이후 그가 살아오면서 획득한 상상력도 오염돼 있다. 「인간적, 이라는 말에 가장 나는 약했다/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그러므로 이제 꿈이 하나 생겼다/바로 인간다운 꿈과 상상력을 버리는 것이다」(「인디언 보호구역」중). 그 가짜 상상력을 버리고 유씨는 새로운 상상력의 길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하종오기자 joha@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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