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놀라게 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시기에서 87년이 노동운동의 전환점이라면, 97년은 노동시장의 전환점이라 할 만하다. 노동력 부족의 시대에서 일자리 부족의 시대로 변했다.이 노동시장의 기류변화는 거꾸로 노동계에 강한 압박을 준다. 그동안 불과 2%대를 기록하던 실업률이 97년말 이후로 꾸준히 증가해 최근에는 9%에 육박하고 있으며, 공식 실업자도 180만명에 이른다. 사실상의 실업자가 400만∼500만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 현상은 노동자나 노동조합, 노동운동에 양자택일을 강제한다. 즉 대량실업 시기에 해고위협 앞에 몸을 도사리며 오로지 생산성과 경쟁력 향상만을 위해 달려갈 것인가, 아니면 더욱 강고한 이념과 조직, 연대와 단결을 바탕으로 생존권을 수호하고 삶의 질 향상을 보장하는 새로운 삶의 구조를 열어낼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그런데 최근의 실업구조와 행태를 보면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도 분명한 윤곽을 그리기가 어렵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히 이른바 「상실세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변수라 본다.
최근의 실업자구조를 들여다보면 연령별로 20대와 30대, 학력별로는 고졸과 대졸학력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3월2일 통계청에 따르면 99년 1월의 실업자 176만2,000명중 20대가 59만5,000명으로 33.8%를 차지해 가장 많았고 이어 30대가 24.7%인 43만6,000명이었다. 20대 실업자가 가장 많은 것은 각 기업이 기존인력마저 해고하는 상황에서 대부분 20대에 해당되는 신규 노동력을 채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98년 이후 졸업한 대학생들은 평균 4명중 1명, 여학생의 경우 10명 중 1명만이 취업을 하고 나머지는 산업예비군의 대열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마치 미국에서 헤밍웨이 등 1차대전 이후 세대가 참담한 전쟁을 유발한 정치체제와 미래에 대한 절망감을 심하게 겪은 것처럼, 경제위기의 시기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전면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경제체제에 절망감과 좌절감을 깊게 겪고 있어 「상실세대」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의 문제는 고개숙인 「아버지」의 문제 못지 않게 심각하다. 어떤 학자는 이들 유휴인력의 잠재력을 10조원 이상이라 평가하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올바른 삶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잃었을 때, 과연 우리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노동시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 사회발전 전망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한국전쟁 직후에 바로 그러한 상실감과 좌절감이라는 사회적 상처를 가슴 깊이 겪은 상실세대가 있지 않았던가. 그 공백을 채운 것이 반공교육과 경제성장의 신화 아래 진행된 박정희식 경제개발계획이었다면, 현재의 「상실세대」가 겪는 정신적 공황은 과연 어떻게 채울 것인가? 생각컨대 이제는 예전과 달라져야 한다. 비록 천천히 하더라도 근본원리를 과감히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요컨대 더 이상 수출주도형, 경쟁력중시형, 재벌주도형, 일류지상주의형 등에 의해 사회와 경제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도 향상형, 삶의 질 중시형, 민초자치형, 사회적 연대형 등에 기초하여 더디 가더라도 올바로 가려는 철학을 세워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입장과 구조를 세계화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경쟁력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삶의 질 세계화」를 대안으로 곧추세워야 한다.
바로 이러한 기초공사가 제대로 되어야지만 그 다음에 비로소 구체적 제도 개혁 프로그램 논의들, 예컨대 공공 일자리 창출정책이나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나누기, 사회보장제도의 구축 등의 논의가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대부분의 개혁들은 원점으로 회귀하고 또다시 과거의 오류가 나타날 것이며 불행하게도 제2, 제3의 IMF가 연거푸 닥쳐올 것이다. 「상실의 세대」를 「희망의 세대」로 뒤바꿀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노사관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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