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소환 하루전인 95년 11월 14일. 정례 브리핑을 하던 안강민(安剛民)대검중수부장은 이날 따라 유난히 신경이 곤두서있었다.정가(政街)는 「14대 대선자금」문제로 마치 용암이 분출하기 직전인 활화산처럼 불타고 있었던 것. 이날 기자들의 질문도 당연히 대선자금문제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13일 안우만(安又萬)법무장관이 대선자금에 대해서도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데 사실입니까』
다소 짜증스러운 표정의 안부장. 『장관으로부터 비자금의 사용처에 대해서도 철저히 수사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대선자금과 비자금의 사용처. 뉘앙스는 차이가 있지만 검찰이 대선자금에 대한 수사의지를 밝힌 최초의 발언이었다.
그로부터 한달후 쯤인 12월 초 어느날 경기 의왕시 포일리 서울구치소. 퀘퀘한 구치소 특유의 공기를 가르며 검정색 포텐샤 승용차가 멈춰섰다. 육중한 체구의 안강민(安剛民)중수부장과 김진태(金鎭太)검사가 차문을 열며 모습을 나타냈다. 안부장은 이날 아주 특별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건물 2층 변호인 접견실. 교도관 2명의 계호를 받으며 백발의 미결수인 노태우전대통령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1,2차 소환에 이은 3번째 만남이었다.
『고생이 많습니다. 어디 불편하신데는 없습니까』
『잘지내고 있습니다. 나 때문에 여러사람 고생시켜 미안합니다』
『구치소안이 춥지는 않습니까』
『그럭 저럭 견딜만 합니다』
『어떻게 소일하십니까. 불경을 열심히 읽고 계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안중수부장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기위해 화제를 불교에 관련된 이야기로 슬쩍 돌렸다.
『불경도 읽고 백팔재배도 하고 있습니다』
노씨는 구속 직후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영호(文永晧)과장으로부터 『건강에도 좋으니 백팔재배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매일 백팔재배를 하고 있었다. 비좁은 독거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운동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안부장이 마음속에 품어 둔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사실은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14대 대선자금에 대해 이제는 이야기를 좀 해주셔야 겠습니다』
안중수부장의 질문은 노씨가 김대중(金大中)국민회의 총재에게 주었다는「20억+α」설까지 이어졌다.
두사람의 이야기는 꽤 장시간 이어졌다. 그러나 이날의 비밀회동에서 노씨가 안중수부장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직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안중수부장의 기억. 『지금에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노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대선자금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죠』
안중수부장은 그러나 잇딴 추궁성 질문에 묘한 뉘앙스의 말을 전했다.
『사실 노통과 나, 두사람이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며 한 이야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밝힐 수는 없습니다. 서로 인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데…』
12월18일 1차공판. 노씨는 대선자금을 묻는 문과장의 신문에 『그것을 밝히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대선자금 문제에 대한 그의 마지막 육성발언. 하지만 대선자금을 안주었다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단지 국가의 장래를 위해 가슴에 묻어두겠다는 것.
노전대통령이 14대 대선당시 YS에게 자금을 지원했는지, 했다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수사는 결국 빈화살만 날린 채 막을 내렸다. 하지만 완전한 「기록세탁」은 불가능한 것. 검찰은 대선지원금의 개연성이 있는 불씨들을 수사기록 여기저기에 흩뿌려 놓았다.
가장 큰 의혹의 대상은 대통령 선거일 15일전인 92년 12월3일 이현우(李賢雨)전청와대경호실장이 노씨의 지시로 동화은행 등에서 인출한 양도성예금증서(CD) 매각대금 300억원과 선거 3일전인 12월 15일 역시 이실장이 전달한 170
억원의 행방. 본지의 특종보도로 알려진 470억원의 인출사실은 시기상 대선직전 실탄으로 건네졌을 가능성이 큰 돈이었다.
하지만 이실장과 이태진(李泰珍)전청와대 경호실장은 검찰에서 『돈을 전달만 했을 뿐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모른다』고 진술했다.
문영호 당시 중수2과장의 회고. 『대선자금에 대해 여러차례 물어봤어요. 특히 470억원의 행방을 추궁했어요. 하지만 대답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오래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노씨도 현직 대통령의 비위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건지…』
또 한가지 흔적은 노씨가 구속되기 직전 작성된 2차 진술조서.
(문과장) 『재임동안 조성된 자금의 총액이 시기별로 어떻게 변했나요』
(노씨) 『취임 초기 1년동안은 들어온 돈이 아주 적었다고 할 수 있고 퇴임이 가까워졌을 때인 92년 4월 총선이후에도 역시 들어온 돈이 적었지만 그해에 있었던 「대선직전」에는 자금이 어느정도 「정상적」으로 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선자금이 「정상적」으로 모였다는 노씨의 진술과는 달리 검찰에서 노통에게 14대 대선무렵 돈을 주었다고 말한 재벌총수들은 LG그룹의 구자경(具滋暻)회장과 동부그룹 김준기(金俊起)회장 단 두명 뿐이다. 구회장은 『대선을 목전에 두고 있어 50억원을 주었다』고 진술하고, 김회장은 『금진호(琴震鎬)의원의 아들을 통해 20억원을 주었다』고 기록돼있다. 검찰수사기록에는 대부분의 재벌총수들이 90년부터 92년 초까지 「일수」찍듯 꼬박꼬박 돈을 내다가 당장 실탄이 필요한 대선직전에는 「돈가뭄」이 든 것.
문과장의 이야기. 『그점이 이상해 추궁을 했지만 대부분 「곧 퇴임하는 대통령에게 무슨 돈을 갖다 바치겠느냐」며 속시원히 말을 하지 않았어요』
14대 대선자금의 비밀은 영원히 지켜질 수 있는 것일까. 노씨의 사면복권과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후 연희동의 참모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있다.
한 연희동 참모의 증언. 『YS가 「한푼도 안받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다가 우리가 무슨 말을 합니까. 하지만 정말 YS가 한푼도 안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중립내각은 선거 3달전의 일입니다. 사실 노통이 가지고 있던 돈도 대선자금으로 쓰려면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요. 물론 그쪽에 넘어가야 할 돈이 다 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것이고요. 비유를 하지요. 남녀간에 혼전에 애를 낳았어요. 보는 시각에 따라 불륜이나 사랑으로 평가가 달라지겠지만 진실은 당사자만이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워낙 은밀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문제는 지나고 보니 아기가 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 거죠. 대선자금과 비자금의 문제도 바로 그런 거라고 봅니다』
그의 이야기는 당선축하금까지 이어졌다. 『우리도 전통(전두환전대통령)처럼 할 만큼은 했어요. 우리가 언제 당선축하금을 안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전통이 노통에게 당선축하금을 얼마를 주었는지 그걸 생각해 보세요(검찰의 전두환전대통령 비자금 조사결과 전씨가 87년 대선후 노씨에게 건넨 당선축하금은 550억원이었다)』
96년 1월 9일 YS는 야권이 불쏘시개로 군불 지피듯 14대 대선자금 문제를 찔러대자 새해 국정연설에서 『검은 돈이나 조건이 붙은 돈은 결코 받지 않았다』고 한발짝 물러섰다. 물론 노씨의 대선지원금여부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그로부터 3년여후인 지난 2월.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은 국회청문회에서 정태수(鄭泰守)한보그룹 총회장이 대선자금으로 150억원을 지원했다고 폭로,정치적인 위기를 맞았다. 한 검찰 간부의 이야기. 『YS가 재임중 정치자금을 받지 않고 비자금 사건으로 정치자금의 성역을 헐어버린 공로는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취임전 정치자금 문제에는 YS도 자유롭지 못하지요』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노씨 사건으로 둑이 터진 대선자금 문제는 이후 한보·김현철(金賢哲)씨 사건 등으로 이어지며 야당의 표적이 돼 「청와대의 YS」를 괴롭히더니 퇴임후까지도 「상도동의 YS」를 곤혹스럽게 만들고있다.
이태희기자taeheelee@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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