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에 신화가 창조된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93년 「서편제」의 흥행기록(서울 103만 5,741명)이 6일 깨진다. 「쉬리」가 한국 영화사를 새로 쓰는 것이다. 불과 개봉 3주만이다. 4일 현재 서울 관람객 수 99만 2,000명. 하루평균 관객 3만 5,000여명. 전국적으로는 220여만명이 관람했다. 국내 최대 흥행기록을 세웠던 「타이타닉」(226만명)이 침몰할 날도 멀지 않을 듯하다. 「쉬리 신드롬」의 주인공 강제규(37)감독. 한국영화의 새로운 장을 연 그를 영화평론가 강한섭(41·서울예술대학)교수가 4일 만났다.강한섭-대단하다. 이런 기록이 나오리라 생각했나?
강제규- 믿기지 않는다. 서울서 80만명 정도는 예상했다.
강한섭- 사실 난 「쉬리」를 편하게 보지 못했다. 그런데 재미있다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영화를 잘못 봤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가 대중성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다.
강제규- 절대 다수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완성도가 탄탄한, 국제경쟁력을 가진 상업영화를 집중 연구, 분석해서 만들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강한섭- 할리우드에 대한 한국영화의 통쾌한 승리이기도 하다. 대중의 기호를 꿰뚫는 감독의 직관력이 대단하다.
강제규- 고교(마산고)와 대학(중앙대) 선배인 김성홍 감독이 『대중성이 없으면 어떤 형태로든 한국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한 말을 듣고 탄력있는 상업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강한섭- 결심을 하더라도 아이디어나 기획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같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던 힘은?
강제규- 어떻게 하면 대중과 호흡할 수 있을까 분석하고 노력한다. 발상의 전환과 몰입으로 보낸 10년의 결실이랄까. 간단하다. 「왜 할리우드영화를 좋아하고 즐기는가」 「우리의 문제는 뭔가」를 관찰하면 핵심이 나온다. 감정을 꿰뚫어 보는 작업이다. 그러면 얼마든지 우리 식이 가능하다.
강한섭- 「쉬리」는 유사 할리우드 장르 전략의 성공이다. 한국영화를 보고 싶지만 그런 장르가 없어 할리우드 영화를 본다. 때문에 「구미호」 「여고괴담」처럼 규모가 작고 투박하더라도 자국 영화가 나오면 앞다투어 본다.
강제규- 개척영역은 무궁무진하다. 「투캅스」가 성공하면, 새로운 시각의 유사 「투캅스」도 나와야 한다. 필요 이상 자존심, 편견이 문제다.
강한섭- 스크린쿼터제 논란이 가져온 애국심, 개봉시점 등도 「쉬리」의 성공요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저 정도면 됐어』하는 관객들의 아량도 엿보인다.
강제규- 「포용력」은 우리 영화의 탄력에 큰 플러스 작용을 한다. 그러나 냉철하게 보면 또 그렇지 않다. 실망시키는 영화는 철저히 외면당한다.
강한섭- 작품 구상은 언제?
강제규- 94년 「은행나무 침대」시나리오를 쓰려 중국에 가서 북한청년들을 만났을 때다. 구체적 결심은 북한 기아와 식량 사태가 발생하면서였다. 어려웠다. 잘못하면 반공드라마가 되니까. 그래서 극적 재미를 부각시켰다.
강한섭- 「쉬리 신드롬」에 이어 「쉬리 히스테리」란 말까지 나왔다. 「쉬리」를 안보면 「왕따」당한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영화의 장기는 멜로물이라는 소리와 시장독점설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강제규- 누구나 한국에서 멜로가 아닌 장르를 그것도 30억원으로 찍는 것은 바보 짓이라고 생각했다. 「쉬리」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제는 탄력적 기획이 가능해졌다. 「쉬리」하나로 극장들이 스크린쿼터를 다 채우면 다른 한국영화가 설자리가 없어진다는 우려도 단견이고 과민반응이다.
강한섭- 액션 첩보 멜로가 혼합된 것이 우리 관객에게 어필했다. 한국관객이 너무 감상적이 아닐까?
강제규- 우리 관객 대부분이 합리적이고 냉철하고 성숙한 대학생들이다. 10대가 몰렸다고 하지만 전체 15%에 불과하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강한섭- 그렇더라도 「쉬리」에는 단점이 있다. 시나리오가 무디다. 유중원(한석규)은 임무보다 우정과 사랑을 선택한다. 「신파」란 느낌이다.
강제규- 처음 내 호흡으로 1시간 55분에 맞추리라 판단했다. 그런데 보통영화의 두배 길이인 250씬이 나왔다. 판단미스였다. 그래서 그것을 줄이다 보니 생략이나 점프가 아니라 비약이 돼버렸다. 직업적 리얼리티 보다는 우리 감정의 선을 선택했다. 영화적 허구, 영화적 시간이란 것도 있다.
강한섭- 국가정보원에서 기립박수를 쳤고, 국방부는 장병교육용으로 상영하겠다고 발표했다.
강제규- 자문을 해준 북한전문가들이 시나리오를 읽고, 남북문제 해결방향에 좋은 모델이 될 것 같다고 했다. 혹자는 고단수 반공영화라고 비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인물이나 상황을 통해 반공을 강조한 것이 있느냐』고. 도입부 8군단의 잔혹한 실상도 30%만 보여준 것이다. 북에 대해 너무 모른다. 굶어죽는데 무슨 전쟁이냐고 판단착오하고 있다.
강한섭- 참, 한석규의 수입이 화제인데, 「쉬리」로 강감독은 얼마 버는가.
강제규- 서울 150만명, 전국 300만명일 경우 25억원이 내 몫이다.
강한섭- 강감독의 자신만만함에 매력을 느낀다. 「맑은 물에 사는 토종 물고기」란 제목이 강감독에게도 어울린다.
강제규- 기록은 깨뜨리기 위한 숫자일 뿐이다. 관객들이 재미있게 봐주고 어떤 평가를 하는가가 더 소중하다. 강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내(탤런트 박성미)와 6살난 아이가 요즘 더 화를 낸다』고 했다. 쵤영이 끝나면 함께 놀아주기로 했는데 더 보기 힘들어졌다고.
/정리=이대현 기자 leedh@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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