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굴젓으로 유명한 충남 서산의 간월도에 가 본 사람들은 안다. 그 자그만 바위섬에서의 낙조가 서해 하늘 전체를 어떻게 극채색으로 물들이는가를. 고은(66) 시인이 새로 낸 장편 「수미산」(대원정사 발행)은 그 낙조를 모티프로 한, 소설로 쓴 불교의 세계관이다.「저 거대한 하늘의 낙조를 바라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낙조 뒤의 보이지 않는 바를 보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낙조를 보는 일, 그것이 관조일 것이다.
소설은 조선 숙종 시대의 시승 인담이 꿈에서 한 승려를 보고 그의 인도대로 황해도 뇌장산의 굴에 묻혀있는 비서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비서는 고려 무신난 당시의 비운의 시인 임춘의 문집 「서하문집」과 수수께끼의 「수미행」이라는 책자였다. 인담이 당초 수행했던 곳은 무욕도, 바로 현실세계에서는 서산의 간월도이다. 인담은 비서를 갖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아비에게 빚 대신 팔린 우녀를 만나 그녀를 무욕도로 데려온다. 나중에는 그 배의 선장도 무욕도로 오고, 무욕도 주위에서 난파한 대중까지 모두 19명의 인간이 인담과 함께 수행한다.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시작된 소설은 고시인의 유장한 맛의 문장, 임춘의 시구를 타고 육도윤회를 넘나든다. 육도는 지옥, 아귀, 아수라, 축생, 인간, 천을 일컫는 불교의 개념. 「선장은 수염 밖에는 생각이 날 수 없을 만큼 그 얼굴이 푸짐한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살찐 꿩이 거북하게 날아가는 것 같은 그런 둔탁한 동작이었고 말 한마디도 고까웠다」는 표현 등 거침없이 생생한 문장이 읽는 맛을 더한다. 그들은 수행과정에서 각자 육도 중의 한 곳을 택해 뛰어들고 지옥에서 도솔천까지를 몸소 체험한다. 삶의 모든 유형을 작가 고씨는 이들의 수행을 통해 샅샅이 뒤지고 있는 셈이다.
고씨가 이런 얼개에 보여주는 것은 애욕에서 죽음에의 욕망까지를 포함한 인간의 욕망과 고뇌이자 그것을 초월하려는 몸부림이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 속의 산, 마음 속의 산이다. 현실에서는 히말라야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산은 인간의 윤회가 펼쳐지는 공간이자 우주인 것이다. 고씨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수미산마저 무너뜨린다. 「마침내 색계, 욕계가 다 없어지는 것이었다. 멸망은 무엇보다 장엄하였다」. 고씨는 윤회를 끊고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의 세계를 넘어, 해탈 그 자체마저 윤회에 포함시키는 넓은 인식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미국 하버드대와 캘리포니아대에서 한국 시와 시론을 가르치고 있다. 이 소설은 당초 「현대불교신문」 창간부터 3년여 연재했던 것. 「소설 화엄경」과 「소설 선」 등을 통해 불교사상을 탐구했던 그가 새롭게 펼쳐보인 대중적이고도 흥미있는 사유의 세계이다.
하종오기자 joha@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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