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직후 우리 정부의 미흡한 대처로 독도에 대한 일본측의 시비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호기를 놓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당시 연합국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친필메모까지 남긴 사실이 확인됐다.1일 국내외 학계에 따르면 51년 체결된 대일 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에 앞서 미국 등 연합국은 10여차례 조약초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1~5차 초안에서는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된 조약초안에 따르면 맥아더 원수는 『일본은 독도에서 떠나야 한다』고 육필로 메모했다. 맥아더 원수의 이같은 인식은 미 해군성 산하 해로측량국이 1942년 만든 지도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한 재미사학자는 『49년 1월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SCAPIN) 677호에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돼 있지만 이 문서에서 보듯 공식문서뿐만 아니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우리에게 유리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했다.
최근 비밀해제된 조약초안을 연구해온 김병렬(金柄烈) 국방대학원 부교수에 따르면 1~5차 검토과정에서 독도는 일본영토가 아니었지만 일본측의 로비로 6차에서는 일본땅으로 뒤바뀐다. 초안 작성자 교체로 7차부터 내용이 간략해지면서 독도에 관한 규정이 누락됐고 결국 강화조약에서 독도는 「무주공도」(無主空島)가 되고 말았다.
이후 우리 정부의 대응은 무지와 무능으로 점철된다. 51년 5월께 8차 초안 검토뒤 미국측에 제시한 11개 요구사항에서도, 같은 해 7월 당시 주미대사관 고위책임자가 초안작성 책임자인 존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을 만난 자리에서도 우리측은 독도 문제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주미대사관은 국내학자들의 요구에 못이겨 2차회담을 갖지만 독도의 위치를 묻는 덜레스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조차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미국은 결국 51년 8월 독도를 한국땅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회신을 보내왔지만 우리 정부가 회신을 보내 바로잡으려 노력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미국측 회신 한달 뒤 대일강화조약에서 독도는 국제법적으로 영유권이 불분명한 섬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김 교수는 『독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전무후무한 국제 협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도 우리 정부는 관심이 없었다』며 『하마터면 일본땅이 될 뻔한 독도가 그나마 강화조약에서 빠진 것이 불행중 다행일 정도』라고 말했다.
/윤순환기자 shyoon@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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