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과 과찬이 만들어낸 「우상」은 아닌지. 안 보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날듯 극장에 몰리는 관객들. 그들에게 「쉬리」(감독 강제규)는 오락일 뿐이다. 모두 『좋은 영화냐?』가 아니라 『재미있느냐?』고 묻는다. 보고나면 그 재미만 얘기한다.그들에게 「쉬리」는 더 이상 「하얀전쟁」이나 「태백산맥」이 아니다. 20세기 우리의 삶을 규정했던, 그리고 새로운 밀레니엄으로까지 이어지는 분단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보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컴퓨터 전자오락에 익숙한 10대 청소년들, 비디오로 할리우드 액션물만 보던 30대 남성들에게 「쉬리」는 기분 좋은 오락이고, 여성들에게는 한석규가 나오는 비장한 멜로드라마다. 한 30대 관객은 『단 한가지 달라진 게 있다. 바로 총격전』이라고 말했다.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쉬리」는 볼만하다. 24억원이란 사상 초유의 제작비를 들먹이며 폄하하더라도 「쉬리」가 얻은 것은 많다. 딱총으로 장난하던 총격전의 탈피가 그렇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은 할리우드에 못지 않다. 관객들은 박찬호가 처음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섰을 때와 비슷한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그 때문에 차분한 눈과 마음을 잃고, 지나치게 너그러워진 것은 아닐까. 사실 「쉬리」는 흥행과는 별개로 곳곳에 허점이 보인다. 연출과 연기가 아닌 카메라의 트릭(흔들림)으로 만든 영상의 박진감, 홍콩액션을 차용한 유중원과 박무영의 캐릭터, 둘의 과장된 대면, 첩보영화로서 허술한 구성, 손강호의 딱딱한 연기, 할리우드 「서든 데스」같은 마지막 축구장의 상황. 여성관객을 의식한 감상주의는 영화를 이방희(유중원의 애인)의 개인운명 속에 가두고 말았다.
그 오락과 감상이 분단현실을 허상으로 만들었다. 할리우드처럼 우월주의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도입부에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살인훈련하는 북한 8군단의 잔학하고 혹독한 모습은 「쉬리」가 오락을 위해 얼마나 분단에 대한 고정관념을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있는가 보여준다.
이무영(최민식)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턱없는 적대감과 광기에 사로잡힌 중동의 테러리스트와 다를 바 없다. 할리우드가 오락을 위해 북한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불쾌해 한다.
그러면서 우리영화까지도 그것을 모방한다면. 「쉬리」에는 우리가 분단의 당사자이고, 지금 그 속에 살고 있다는 자의식이 없다. 그것이 「쉬리」를 편하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또 「쉬리」가 흥행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대단한 작품성을 갖지 못한 이유다.
/이대현 기자 leedh@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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