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지구촌 언어『21세기에는 하나의 지구문화가 창출된다. 현재 세계 언어의 90% 이상은 소멸할 것이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세계미래협회(WFS)는 97년 전세계의 지도적인 학자, 경제인, 과학자들을 동원한 미래진단 프로젝트에서 「21세기 전망 톱 10」을 발표했다. 그 1위는 바로 「세계언어의 90% 소멸」이었다. 근거는 간단했다.
21세기에는 첨단 정보기술의 발달로 초소형 컴퓨터 칩이 인간의 몸 속에 삽입될 것이다, 이 칩은 신용카드는 물론 여권 운전면허증 등 모든 개인기록의 기능을 수행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인체내 컴퓨터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켜 현재의 소수언어들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기본적 국제언어로서의 영어다….
8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페인 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는 『2000년이 지나면 세계의 언어는 영어와 스페인어, 아랍어, 중국어 네종류만 남고 나머지는 사라져 지역적 방언이나 사어(死語)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국어인 스페인어에 가중치를 두긴 했지만, 그의 발언 요지도 세계미래협회의 주장과 비슷하다. 『통신기술 발달과정에서 생기는 무수한 언어를 필요한 것만 흡수하며 견딜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스페인어이며, 불어나 독어는 망각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나오는 「지구촌 소수언어 소멸론_단일언어화론」에는 컴퓨터·통신기술의 발달이 기본적 전제가 된다. 세계화한 컴퓨터통신, 인터넷 등 사이버 공간에는 이미 언어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전쟁은 소수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종족들이 벌이고 있는 현실의 유혈전쟁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큰 전쟁이다.
1930년대까지도 세계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2억 정도에 불과했다. 지금은 최소 14억 이상이 영어를 모국어 또는 공용어로 사용한다. 10여년 전 전세계 컴퓨터 정보언어의 80% 이상을 차지했던 영어는 지금은 인터넷 웹사이트의 90% 가까이를 독점하고 있다. 간단한 예로 인터넷 상 최대의 서점인 미국의 「아마존」을 보자.
세계 각국의 네티즌들에게 책과 비디오 등을 통신판매하는 이 서점에서 한국인이 주문할 경우 한글로 된 주소로는 물건을 받을 수가 없다. 한글로 주소를 보내면 이 사이트는 『한국어, 한자, 일본어는 우리 시스템에서 다룰 수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온다.
언어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크고 작은 토착언어의 수는 6,000~7,000개. 이들 중 3분의 1은 100년 내에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토착언어의 소멸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호주 대륙에서는 식민통치가 시작된 18세기말 250여개나 되던 토착언어가 지금은 25개밖에 살아남지 않았다.
『하나의 언어가 사멸된다는 것은 수백년~수천년에 이르는 인간경험이 동시에 사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처럼 언어의 사멸은 바로 인간정신의 사멸을 의미한다.
내전으로 편할 날 없는 알제리의 베르베르족은 지난해 8월 아랍어를 공용어로 하고 소수민족언어를 쓸 경우 벌금을 물리겠다는 법이 발효되자 자신들의 고유언어인 타마지트어를 지키기 위해 「무장 베르베르운동」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언어전쟁을 벌였다. 최근 세르비아 점령지 코소보에서 일어난 알바니아어 부활 움직임 등 끊이지 않는 지역·민족분쟁의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언어문제다.
앵글로색슨 지역의 한 방언이었다가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 영어의 세계언어 지배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일까? 영어의 지구촌 단일언어화 문제는 최근 한국에서도 커다란 논쟁을 낳았다. 자신의 저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서 폐쇄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영어 공용화론을 폈던 소설가 복거일씨의 주장에 대해 많은 논객들이 찬반론을 펼쳤다. 문화부가 행정부 공문서와 도로표지판 한자 병기를 내용으로 한 법률 개정을 추진해 논란을 빚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언어문제는 바로 힘의 문제이다. 영어의 세계지배는 곧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세계지배)」를 의미한다. 인터넷의 세계정보망화는 영어를 앞세워 정보통신기술의 위력으로 새로운 세계지배를 이루어가고 있는 미국의 파워 구현에 다름 아니다.
아무리 큰 실물경제력, 거대한 언어인구를 갖고 있더라도 이 막강한 언어와 정보통신력의 결합 앞에서는 무력하다. 일본에서는 정보네트워크 시대의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메이지 시대에 영어를 공용어로 정했더라면…』 하고 탄식하는 식자까지 나온다.
1억명이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유럽 8개국은 지난해 8월부터 2005년까지를 목표로 독일어의 까다로운 문법규칙을 없애고 철자법까지 바꾸면서 독일어의 영향력 감소에 저항하려 하고 있다.
영어라는 현실적 거인 앞에서 키재기를 하는 난쟁이 같은 몇십 개의 소수언어들. 21세기 지구촌 언어의 모습이 이렇다면 그것은 암울하다. 우리에게 당장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는 통신언어가 한글의 틀과 모습까지 바꿔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솨여(어서 오세요)」 「즐팅하세요(즐거운 채팅 하세요)」등 젊은이들의 통신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기성세대가 얼마나 될까. 통신상에서 「서울」은 「설」로 굳어진 지 오래다. 지구문화를 따라잡으려는 노력 못지않게 우리의 언어를 가꿔나가는 것은 21세기 한국의 과제이자 도전이다.
/하종오기자 joha@hankooilbo.co.kr
*[새천년을 연다] 언어파괴 가속
효율성이 존중되는 2000년대에는 언어 파괴가 가속될 것이다. 편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의 최소화를 주장하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언어의 주인은 어중(語衆)이니 당연한 일이다.
언어파괴는 사이버 공간에서 이미 현실화했다. 먼저 영어. 미국 AP통신은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현대언어협회 연례회의 내용을 보도했다.
「LOL(LAUGHING OUT LOUD·크게 소리내 웃는다) 」 「HOW OLD R YOU(몇살이세요」 「HELLO EVERY 1(여러분 안녕)」. 행사에 참석한 학자들은 이런 표현들이 머지않아 인터넷에서 벗어나 일상언어로 정착될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내렸다.
다음 한글. 「전 설 2통3반 대딩 010(나는 서울 사는 23살의 남자 대학생」「우리 둘 다 설 세요」(우리 둘 다 서울에서 살아요) 「당근(당연히)」 「까대기(이성 친구 사귀기)」 「깔(여자 친구)」 「버져(꺼져라)」 「삐야(호출기)」 「은따(은근히 따돌리다)」 「새탈(가출)」….
한글학회 허웅회장은 『편하지만 인체 건강에 해로운 것이 많듯이, 언어생활도 편리함만 추구하면 문제가 생긴다』며 『원칙을 지키는 효율성 추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새천년을 연다] 도전받는 '한국어=단일국어' 등식
새 밀레니엄에 한국언어 지도는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을 것이다.
20세기 말 「종이」이라는 장(場)에서 탈출한 언어는 사이버 공간에 자리를 잡는다. 또 세계화의 물결은 언어에도 밀어닥쳐 경쟁력 없는 언어(혹은 단어)는 「퇴출」되고, 한글과 외국어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20세기 이 전쟁은 이미 발발했다. 지금은 단지 휴전 상태일 뿐이다. 이른바 「영어 공용화」 논쟁. 논객은 소설가 복거일씨였다. 그가 내놓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발행)는 모국어 문제를 중심으로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드문 지적 모험이었다.
논지는 이렇다. 『언어생활에서 쓸모있는 말들을 특정 외국어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몰아낸다면 시민들에게 언어 편식을 강요하는 일이다. 「네다바이」처럼 딱 들어맞는 한국어가 없는 어휘들은 일본어라도 도입해야 한다』 그의 논지는 한국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영어 공용화」론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서울대 한영우(국사학과)교수. 『약자가 싸우지 않고 항복해버리는 것은 일단 합리적 선택이다. 그러나 지고나서 계속 강자만 섬긴다면 노예다.
경제적 논리로 본다면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니 노예처럼 안정된 삶도 없다. 「지구 제국」은 환상이다. 몇몇 강대국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한교수는 각론 부분에서 복씨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영어 공용화」론의 기본전제를 부정했다.
최근에는 한자와 한글의 전쟁이 선포됐다. 이번에는 강자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배려」가 이유다. 곧 행정부 공문서에는 한자가 병기될 것이다. 여기서 그칠까. 중국 관광객이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할 때 한자 혼용주장이 제기될 것이다. 다분히 한자와 히라가나를 혼용하는 「일본식」이다.
한글전용론자들은 말한다. 한자교육과 한자혼용은 별개라고. 그렇다. 한자혼용을 하든 한자병기를 하든 한자교육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한글과 외국어 혼용은 신중해야 한다.
언어는 사상과 정서를 담는 그릇이 아닌가. 한 언어학자는 『정보화 시대를 맞아 한글의 언어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서사봉기자 sesi@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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