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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녁화문기행] 단군릉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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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녁화문기행] 단군릉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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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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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릉은 평양 시내에서 35㎞ 떨어진 근교에 위치했다.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 동남쪽 기슭. 고속화도로처럼 널찍한 도로가 질주하는 속도감을 안겨 주었다. 도로상에서 우리 말고는 단 한 대의 자동차도 만나지 못했다. 40분 가량의 호사였다. 저녁나절이었다. 평화로운 들판이었다. 어쩌다가 농가들이 모여 있었다. 거대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그것은 적당한 높이의 산등성이 위에 하얗게 쌓아올린 피라미드(?)였다. 20세기 후반의 평양 시민이 쌓아 올린 거대한 축조물이었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드넓은 주차장만이 더 넓게 보였다. 안내원이 부재중이어서 우리는 길가에서 기다렸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무가지를 수레에 가득 싣고 지나가는 농부가 보였다. 거대한 단군릉을 배경으로 하고 그는 귀가하는 중이었다. 주민의 검은색 차림새와 단군릉의 백색이 묘한 대조를 이루어 나의 생각을 일시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차안에서 나는 안내원에게 수고를 끼치게 돼 미안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하루에 몇 번 정도 안내를 하게 되냐고 물었다. 안내원 아가씨의 대답은 안내원 강사 3명이 1일 5회 정도씩 방문객을 맞고 있다고 밝혔다.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묘역의 바로 옆에 차를 세우고 석양을 등지고 개건기념비 앞으로 갔다.

『단군릉은 지난 93년 초 강동의 단군 유해를 발굴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개건(改建)사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단군 무덤으로부터 약 십리정도 떨어진 이곳에 새롭게 자리를 잡아 1년간의 공사 끝에 94년 10월3일 준공했습니다. 10월3일은 단군의 생일이 아닙니까. 여지껏 설화 속의 단군이 이제 역사 속의 실제 인물로 드러났음은 물론 그가 평양지역의 출신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군의 생일이라, 그 날이 바로 개천절이 아니었던가. 생일에 무덤을 쓰기. 흥미롭군, 짧은 생각이 스쳐갔다. 안내원은 사명감을 가지고 설명을 했다. 너무나 진지한 태도라서 궁금한 것이 지나가도 끼어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입은 열리고 말았다. 『발굴했다는 유해가 단군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순간적으로 언짢은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처음으로 받아보는 질문인 것 같았다.

아니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는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잠깐 머물다가 나온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강동읍지에 나옵니다』 학자들의 전문연구 성과물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지난 93년 10월과 94년 10월의 「로동신문」은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학술토론회 내용을 전재한 바 있다. 이를 중심으로 단군릉에 대한 북한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하고자 한다.

단군이 고조선의 건국 시조라고 밝힌 최초의 책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三國遺事)」다. 이후 「제왕운기(帝王韻紀)」 같은 책에서도 단군을 우리 역사의 맨 첫 머리에다 올려 놓았다. 불행하게도 일제 시대의 우리 민족사 왜곡 책동은 단군을 실재 인물이라기보다 후세에 꾸며낸 신화적 인물이라고 폄하케 했다. 하지만 단군릉에 대한 기록은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강동 소재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들 수 있다. 강동현의 서쪽 3리에 둘레가 410자인 무덤이 있는데 민간에서 단군묘라 전한다고 밝혔다. 즉 북한에서 발굴하여 단군무덤이라고 확인한 문제의 무덤이 이것이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숙종(肅宗)시절(1697년) 강동의 단군묘와 평양의 동명왕묘의 수리를 승인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 강동의 단군릉에 대한 인지도는 나름대로 꽤 높았었다고 추측하게 한다. 일제시대 즉 1936년 강동군 인사들이 단군릉 수호회를 조직하고 기적비까지 세우기도 했다. 현재 이 석비는 개건된 단군릉의 입구에 개건비와 마주 보고 서 있다.

원래 단군릉은 고구려 양식의 돌칸흙무덤(石室封土墳)으로 되어 있다. 단군릉을 고구려 시기에 개건했다는 의미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목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삼국유사」의 내용을 신봉한 결과이기도 하다. 단군릉이 강동에 있는 것은 원래 단군이 평양에서 살았고 또 평양이 도읍지였고 그리고 죽은 장소도 평양이라는 주장이다.

단군릉이 평양에 있을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불행하게도 이 무덤은 일제시대에 도굴되어 대다수의 부장품은 유실되었다. 다만 이번 발굴작업에서 두 사람분의 뼈가 발굴되었다.

단군릉의 뼈는 모두 86개였다. 이를 성별로 분류하니 단군의 뼈가 42개이고 여자의 것이 12개, 그리고 성별 구별이 어려운 것이 32개였다. 남자만이 남아있는 골반 뼈는 두껍고 완강하게 생겼으며, 수명은 50세 가량, 하지만 웃팔뼈까지 관찰하게 되면 70세까지 장수한 것으로 감정이 됐다. 남자의 키는 170㎝이상으로 장대한 체격의 소유자이다. 남자의 인골은 장수한 것에 반해 여자의 경우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뼈를 절대연대측정법에 의해 분석했다. 방법은 현대물리학의 첨단기술이라는 전자상자성 공명 연대측정법을 채택했다. 그 결과 93년 현재 「5,011 267년전」이라는 연대를 얻었다. 상대오차는 5.4%이다. 단군 뼈에 대한 연대측정은 6개월간에 걸쳐 모두 54회 측정하였는데 「루적선량」계산은 시료를 코발트 _60 감마선으로 쪼임하여 곡선을 얻은 다음 최소 제곱법으로 1차 회귀 방정식을 작성하여 계산한 것이다.

5,011년전이라. 대단한 숫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단군의 뼈만 이렇게 남아있을 수가 있을까. 그곳은 무덤이 석회암 지대이기 때문이다. 화석화되어 영구 보존도 가능할 수 있다. 중국 서안의 반파 유적에서 6,000년전의 인골 수백개체를 발굴한 전례도 있다. 그러니 5,000년전의 뼈를 가지고 그렇게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는 어떻게 되는가. 일반적으로 B.C 2333년이 단군의 건국연대로 통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단군이 686세에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문제가 된다. 기원전 2333년설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단군의 건국연대를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로 상정한 것에서 기인한다.

간군의 건국연대가 중국보다 앞설 수 없다는 사대주의 때문에 중국과 동시기로 놓은 것이다. 5,011년전의 단군. 단군은 기원전 31세기말에 출생한 것으로 보아 단군의 건국연대는 기원전 3,000년대 초로 보아야 한다. 북한 학자들의 단군에 얽힌 주장은 대개 이와 같다. 획지적인 주장들이다.

『석릉은 집안(集安)의 장군무덤 형식을 참고하여 규모있게 축조했습니다. 9층으로 높이는 22㎙이고, 한변의 길이는 50㎙입니다. 94년 준공한다하여 1994개의 돌을 사용했습니다. 후면에는 출입구를 설치하여 석릉 내부의 중앙에 안치한 목관까지 출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 석릉의 네 귀퉁이에는 범을 새겨 놓았습니다. 만수대 창작사에서 제작한 석조 범 조각의 한마리 무게는 90톤에 이릅니다. 사실 160톤짜리 통돌을 사용하여 조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단군시대의 상징으로 청동비파형단검을 세웠습니다. 석인상은 단군의 네 아들로서 왼쪽 첫번째가 큰 아들인 부루입니다. 진입로의 계단은 총 289개이며 좌우의 석인상 8명은 단군의 신하들입니다』

실로 대단한 역사(役事)이다. 10년전에 장군총에서 받은 감동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대단한 규모였다. 각을 지게 조각을 한 호랑이가 직선의 석릉에 변화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호랑이의 네다리 사이를 깎아내지 않고 통돌을 그냥 두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거칠게 마감하여 상체의 매끄러운 선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석실(石室)이 매우 훌륭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단군릉에서 나의 눈길을 가장 많이 쓴 것은 입구의 화강석 기둥이었다. 일종의 출입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대형 화강석을 대충대충(?) 거칠게 깎아 세워 놓은 석주(石柱)이다. 높이가 10m에 이른다고 했다. 아하! 추상미술이다! 이것이야말로 북한 최고의 설치미술이 아닐까.

후면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때는 내부를 석재로 빈틈없이 쌓아올렸을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안에는 의외로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천정은 고구려의 벽화고분들처럼 말각조정법으로 처리했고 정면의 벽에는 단군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었다. 검은 수염의 갸름한 얼굴의 단군상이 인상적이었다. 초상화 앞의 넓은 공간의 단 위에는 두개의 목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왼쪽이 단군의 실제 유해라 했고, 오른쪽은 그의 부인이라 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단군 할아버지의 유해 앞에 서 있을 수가 있다니.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갔던 통로를 통하여 되돌아 나왔다. 처음 들어갈 때는 갑자기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던 것이 나올 때는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제 제습기였다. 아하!고구려 벽화고분에도 설치하지 못한 시설이 단군릉에는 있구나.

밖으로 나오니 석양에 호랑이가 포효하고 있었다. 안내원 아가씨와 헤어지고 우리는 차에 올랐다. 백동무가 한마디 거든다.

『단군 유해를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관짝을 열고 유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1인당 미화 1,500달러씩 받았는데 비싸다고 하여 요즈음에는 300달라로 인하했습니다』 나는 단군릉에서 한아름 숙제를 안고 정문을 빠져 나왔다. 글 윤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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