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죄가 있다면 정치활동을 했다는 것 밖에 없소.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 주시오』 지금부터 꼭 40년전인 59년 7월 31일 세칭 「진보당사건」에서 간첩혐의로 생을 마감할수 밖에 없었던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의 최후 모습이다. 이날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 졌다. 1899년생이니 올해로 탄생 100주년이다. 유족과 그를 따랐던 후배들, 창녕 조(曺)씨 문중을 중심으로 최근 그의 명예회복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제헌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2대 국회의원, 2대 국회부의장등이 조봉암의 주요경력이다. 이승만의 카리스마통치에 맞서 52년과 56년 두차례 대통령선거전에 나섰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56년엔 신익희(申翼熙)후보의 급서로 혼란해진 대통령선거에서 216만표를 얻었고, 500만표에 그친 노쇠한 이승만의 차기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정적으로 부상했다.
■조봉암은 57년 2월 진보세력 결집체인 진보당을 창당했다. 60년 대선을 겨냥했음은 불문가지다. 진보적 지식인등이 몰려 당세는 커졌지만 이것이 호사다마였다. 58년 1월 그는 간첩혐의로 체포됐고 그해 2월25일 진보당은 등록취소됐다. 이승만정권의 노림수가 어디에 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조봉암은 그해 7월2일 1심재판에서 간첩혐의는 무죄가 됐으나 징역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우익의 관제데모가 휩쓴후 10월25일 항소심은 조봉암에게 간첩죄등을 인정, 사형을 선고했다. 최후진술에서 조봉암은 『정치적으로 조작된 사건이니 사형 아니면 무죄를 달라』고 당당했다. 이듬해 59년 2월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고 7월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술이나 한잔 달라』는 마지막 청도 거부된 채 형이 집행됐다. 근거없는 용공음해에 시달렸던 동병상련의 김대중정부의 반응이 궁금하다. /노진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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