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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육사졸업 첫 흑인 사후 59년만에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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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육사졸업 첫 흑인 사후 59년만에 복권

입력
1999.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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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육사졸업 첫 흑인 사후 59년만에 복권

1999/02/19(금) 17:34

미 육군이 100년 이상 짊어져온 불명예의 굴레를 벗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19일 미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가 배출한 첫 흑인 장교의 독직사건에 대해 사면복권을 발표, 명예회복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1877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뒤 횡령혐의로 군문을 떠나야 했던 헨리 플린트가 사실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였음을 클린턴 대통령이 공식 확인, 사후 59년만에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당당히 회복하게 된 것이다.

조지아주 토마스빌에서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플린트는 1873년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웨스트 포인트에 입학했다. 사관후보생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혹독한 훈련을 마친 플린트는 76명의 동기생 가운데 50등으로 졸업했고 바로 오클라호마의 제10기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버팔로 솔져」로 불리운 이 부대는 당시 흑인으로만 구성된 두 개의 부대 가운데 하나였으며 플린트소위는 최초의 흑인장교가 되었다.

문제는 그가 1881년 텍사스주 포트 데이비스의 부대로 전출한 뒤 발생했다. 부대내에서 4,000달러 가량의 공금이 증발한 사건을 두고 상관들이 그를 횡령혐의로 고발한 것. 군법회의에서 횡령혐의는 무죄로 밝혀졌지만 공금증발 사실을 보고하지 않는 점이 지적돼 결국 장교로서의 품위손상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당시 육군 법무참모에게 보고되고 다시 체스터 아서 대통령의 손에 최종 결정권이 넘겨졌다. 아서 대통령은 군법회의의 판결이 타당하다고 확정했고 그는 불명예 제대를 감수해야 했다.

군문을 떠난 플린트는 측량기사로 국무부, 내무부 관리로 활동하다가 1940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미 육군 기록정정국의 재심에서 그가 겨난 것이 인종차별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고 이에 따라 플린트의 자식들에게 명예 제대증명서가 발급됐다. 하지만 아서 대통령이 확정한 판결에 대해서는 육군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복권은 각계의 끈질긴 명예회복 운동이 뒷받침됐다. 미국 최초의 흑인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도 재임당시 자신의 사무실에 플린트의 사진을 걸어 놓았고 웨스트 포인트는 매년 극기력과 지도력이 뛰어난 사관후보생에게 헨리 플린트 상을 수여해 왔다.

또 고향인 조지아주에 있는 그의 묘역은 주정부차원에서 관광지로 꾸민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이날 복권기념 행사에는 당연히 콜린 파월 전 합참의장도 참석했다.

/김정곤기자 kimjk@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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