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론] 지역갈등은 '망국병'
1999/02/18(목) 18:42
- 임현진 林玄鎭·서울대교수·사회학 -
한국사회의 통합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로 지역갈등을 들 수 있다. 지역갈등 앞에는 진보와 보수, 혹은 재야와 제도권의 구분도 없을 지경이니 그야말로 망국병임이 분명하다. 국민형성을 위한 사회통합이 무망하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지역갈등이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산업, 빈부, 연령, 남녀 분화와 중첩되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반세기에 걸친 우리사회의 불균등한 압축발전의 과정에서 우리 국민들은 지역, 계급, 세대, 부문, 성에 있어서 다양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사회갈등도 이제 그것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는 복잡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재벌기업 사이의 빅딜의 여파로 인해 영남지역에서 지역갈등과 노사대립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보기이다.
이를 단지 지난 날의 불균형 지역개발의 결과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벗어날 수 있다. 사회갈등의 악순환이 일어날 정도로 우리 사회의 불화와 마찰이 예전에 비해 훨씬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아래에서 대량실업의 발생은 노사대립과 지역갈등을 계급반목으로 치닫게 할 위험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역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각적이고 발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PK나 TK출신 인사를 중용하여 민심을 돌려보려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법제정을 통해 국민화합을 이끄려는 것도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법이 없어서 지역감정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정은 그 반대일 수 있다.
사실 지역감정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자기 고장에 대한 자긍으로서 애향심은 지역발전의 초석이다.
그러나 지역감정이 연고주의와 합쳐져 다른 지역의 배척과 차별로 이어지면 갈등과 대립을 낳게 된다.
우리사회에서 지역감정이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동안 영남세력이 지배권력의 핵심을 이루어오면서 정책결정, 개발전략, 인사충원, 자원배분 등에서 공정하지 못한 국가운영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정치의 병폐로 지적되고 있는 지역 할거성도 바로 그러한 불균등한 지역구도에 바탕하여 나타났다.
집권세력이나 도전세력을 불문하고 정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달성하기 위해 지역주의를 서로 이용하고 역이용하는 과정에서 지역갈등은 악화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주된 피해자가 국민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역갈등의 뿌리는 삼국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남의 영호남(嶺湖南)갈등이나 북의 함평(咸平)갈등도 그 시발은 꽤나 오래되었다.
조선의 영특한 임금 정조가 「의리탕평책」을 쓴 것도 당시 꺼질지 모르는 문벌과 지역에 근거한 당쟁을 극복하기 위한 고뇌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5년이 지나지 않아 24년에 걸친 개혁정책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세도혁파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은 인사정책의 한계를 읽을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정당체제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가부장적 사당(私黨)체제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소수의 정치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지역을 볼모로 한 담합구조는 시대변화에 따른 다양한 사회갈등을 논의구조에서 배제하고 있다.
동서화합이라는 명분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숫자 늘리기식 정계개편이 갖는 불협화음도 바로 이때문이다.
여기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현존하는 사회갈등을 대변하는 신진 정치세력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하여야 한다.
둘째, 지역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여러 시민단체 및 이익집단과 정책협의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사회성원의 다종다양한 의사를 확대할 수 있도록 전국 단위의 비례대표성을 고려한 정당명부식 투표제의 도입을 적극 검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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