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수배 농성자들의 대리세배
1999/02/13(토) 18:07
『많이 여위었구나』『새해에도 건강하십시오』 세배를 드리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별 말이 필요없다. 이심전심일까, 동지(同志)적 결속일까.
지난해 8월7일부터 서울 종로구 조계사 처마밑에 천막을 치고 문민정부때의 정치수배자 수배해제를 요구하며 외롭게 농성해 온 「조계사 농성단」학생 9명이 설을 앞둔 13일 떡국과 조촐한 음식을 준비했다.
그간 자신들을 위해 거리를 누벼온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소속 어머니 30여분을 모시고 「대리(代理)세배」를 드리는 자리.
학생운동으로 7년이라는 최장기 수배기록을 세운 오창규(吳昌圭·32·전남대 심리))씨가 먼저 입을 연다. 『추우시죠, 어머님』 『설인데 고향에도 못가고』 전대협의장을 지낸 임종석(任鍾晳·31)씨의 어머니인 김정숙씨의 대답도 짧기만 하다.
무릎관절 수술을 받고 고향인 전남 장성에서 요양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는듯 김성숙(金晟夙·27·여·전남대 가정관리)씨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옆에 앉은 김현곤(金鉉坤·30·서울대 농화학)씨는 간암으로 돌아가신 선친의 임종을 못지킨 불효에 고개를 못든다.
이들은 8·15특사를 앞두고 정치수배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지난해 8월9일 농성을 시작했다. 160여일동안 어김없이 오전5시30분이면 일어나 108배를 올리고 대웅전 마당을 쓸었다.
농성 108일째(지난해 11월24일)에 치른 3,000배의식 등 용맹정진에 스님과 불자들도 감복, 주위의 눈을 피해 음식을 전하는 친분도 쌓였다. 고산(暠山)총무원장도 최근 108단주 9개와 함께 설을 쇠라며 금일봉을 건넸다.
이날 마련한 수정과와 떡국 더덕구이도 그 돈으로 장만한 것. 모처럼의 진수성찬이지만 수배전 먹던 어머님의 설 음식이 눈에 밟힌 탓인지, 수저놀림이 가볍지 않다.
『여·야 정권교체를 이룬 국민의 정부에서 우리 농성이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습니다』 상 위의 음식은 줄어들 줄 모르고 식어만 갔다.
/최윤필기자 term@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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