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녁화문기행] 천리마동상서 만수대 기념비까지
1999/02/13(토) 19:48
- 평양은 기념조형물 천국
평양은 공공미술의 천국이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극 정성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세울 때만 요란하고 세월이 지나면 망각 속에서 푸대접받는 일반적 예와는 차원이 다르다. 평양의 조소(彫塑) 예술가(흔히 조각가라고 통용되고 있으나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들은 분주했겠다. 상당량의 대형 조형물을 제작해야 했으니 얼마나 애를 썼을까. 기념비적 조소예술의 나라이다. 대개 사회주의 국가들이 기념적 조형물을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회주의 국가의 조소기술은 우수하다고 한다. 특히 사실주의적인 인체상의 형상력은 탁월하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규모가 거대하며 그 내용 또한 강렬하다. 모자상(母子像)이나 나녀상(裸女像)에만 익숙한 타지의 내방객들에게는 이색적으로 보일 지 모르겠다.
평양에서 본 기념조형물 가운데 인상적인 것으로 다음의 다섯가지를 들고 싶다. 아마 이들은 「북한현대 조소예술사」의 대표작으로도 언급될만한 것들이리라. 즉, 천리마동상, 주체사상탑, 개선문, 대성산 혁명열사릉, 만수대 대기념비 등이다. 이들의 내용이야말로 북한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예술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웅변해 주는 조형물이다. 따라서 이들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평양의 본모습을 파악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거꾸로 말한다면 이들 기념조형물의 이해없이 평양여행을 운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미흡하다는 듯이다. 그만큼 평양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념과 이상을 이들 기념상으로 집약시켜 조형화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서울의 시각으로 이들 조형물들을 관찰하러 다니는 것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시내에서의 이동중에라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 위의 조형물들이다.
천리마동상은 1961년 4월15일 제막식을 한 기마상이다. 조선미술가동맹 조각창작단을 중심으로 「집체적 지혜」를 합쳐 「창작전투」한 결과물이다. 원래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상상 속의 말이다. 따라서 동상은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해 날개까지 달아주고 질주하는 모습을 취했다. 다른 나라의 기마상은 대개 황제나 영웅같은 「권위적 인물」이 말을 타고 있음에 비해 여기의 천리마동상은 젊은 남녀가 타고 있다. 남자는 붉은 편지를 높이 치켜들고 있으며, 여자는 볏단을 한아름 안고 있다. 노동계급(남)과 농민(여)을 상징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천리마 기수인 셈이다. 이는 전후경제복구건설시기의 사회적 지표를 담고자 한 조형물인 듯하다. 동상의 높이는 14m, 길이는 16m이며 좌대를 포함한 총높이는 46m에 총무게는 100여톤이다.
천리마 동상은 그동안 사진이나 그림 등을 통하여 많이 알려졌었다. 모란봉공원과 만수대 언덕으로 갈라진 언덕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눈에도 잘 띈다. 조망이 좋아서인지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화폭에 즐겨 담았다. 예전에 화집에서 본 그림 가운데 「천리마 동상의 아침」(리상문 작, 1974)과 같은 조선화가 생각이 났다. 화사한 화면에 평양시를 배경으로 꽃동산 위의 천리마 동상이 우뚝 솟게 그림 그림이었다. 너무나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부분 부분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평양 입성 첫날 우리들은 순안공항에서 호텔로 가면서 개선문을 통과하고 이내 천리마동상 앞에 당도했다.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나왔다. 아! 여기가 천리마동상이군요. 도판으로만 보던 실물이 바로 눈앞에서 우뚝 서 있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주체사상탑은 1982년 김일성주석의 70회 생일을 기해 대동강변에 건립한 것이다. 평양의 중심지인 김일성 광장에서 대동강을 끼고 직선으로 바라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천연 화강석 재료로 높이 170m의 봉화탑 형식이다. 이 탑은 봉화탑을 필두로 군상주제편과 정각(亭閣)의 세가지 구성으로 나뉘어져 있다. 봉화탑(높이 70m)은 자유형으로 불길형상만도 20m가 넘는다. 밤에는 불길이 타오르게 장치되었다. 즉 4개의 파도형을 한 주기로 전자 불길 장식으로 불길을 밝히게 했다. 수십톤의 무게인 이 봉화탑은 세계적 최대규모라고 자랑한다. 나는 호텔에서 활활 타오르다가 밤 10시쯤 꺼지는 봉화도 목격했다. 주체탑은 몸에 「주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주체탑에는 인물조각군상이 있다. 그 가운데 탑의 정면에 서 있는 3인상(높이 15m)이 눈길을 끈다. 노동자 농민 지식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망치 낫 붓을 높이 들고 있다. 주체사상탑의 좌우에는 부주제군상이 있다. 예컨데 「주체공업」 「철벽의 요새」 「무병장수의 나라」가 좌측에 「만풍년」 「배움의 나라」 「주체의 예술」등이 우측에 형상화되어 있다.
주체사상탑은 김주석의 70회 생일기념의 의미가 있음인지 70개의 단에 2만5,550개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숫자는 김주석이 살아온 날짜를 의미한다고 한다. 탑신부는 4각추형으로 모서리마다 처마를 두었으며 내부에는 세계 70여개국이 보내온 230여개의 돌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어 평양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정각은 2층 지붕에 아치형 문의 건축물이다.
개선문은 주체사상탑을 세우던 1982년 모란봉경기장(현 김일성경기장) 앞에 세운 문이다. 문에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1925~1945」라는 연대가 있다. 나는 안내원에게 저 숫자는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그것은 김주석의 항일혁명의 투쟁기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개선문은 조국 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기리기 위한 대기념비라는 것이다. 이 개선문은 파리의 개선문과 언뜻 보면 흡사해 보이나 민족적 목조건축 양식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민족적 특성과 현대성을 결합시킨 건축물이란다. 특히 높이가 70m이기 때문에 세게에서 제일 큰 개선문이라고 자랑한다. 규모는 연건평 6,800㎡에 1만500개의 화강석으로 높이 60m이다. 무지개문길은 높이 27m에 너비 18m이다. 승강기가 있고 전망대도 있다. 지붕은 합각지붕형식을 지니고 있다. 노대에는 백두산이 새겨져 있다. 개선문의 기둥에는 부주제부각상이 있다. 다양한 형상의 인물상들이 부착되어 있다.
대성산혁명렬사릉은 주제사상탑의 완공 직후 확장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1985년10월8일 준공식을 가졌다. 이곳은 항일투사를 기념하고자 특별히 설정한 묘역이다. 대성산 산자락을 원만히 정지하여 묘비마당과 교양마당으로 구성했다. 역시 핵심은 투사들의 실물대 흉상이다. 무광택 순동색으로 착색되어 느낌이 색다르다. 대상인물들이 사실적으로 형상화된 정면상이다. 이 청동인물상은 화강석 대좌에 올려져 있다. 대좌의 정면에는 이름과 직함 그리고 생몰연대등이 표기되었다. 이 흉상들은 좌우로 줄을 맞추어 대좌위에 놓여져 있다. 흉상의 크기는 일률적으로 처리되었으며 가장 높은 지대에 김정숙상을 비롯, 13상이 중심축으로 배치되었다.
인물상 구역의 뒤에는 휘날리는 붉은 깃발이 있고, 앞에는 영웅메달을 부각한 화환진정대가 있다. 하지만 미술계 종사자로서 눈길을 끄는 곳은 입구 양측의 대형 조각상이다. 추모군상이라고 불리는 이 조형물들은 항일투사의 추모의 마음을 담고 있는 모습이다. 화강석의 이 조각들은 「방어」와 「진군」으로 마주보고 있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인물상들의 표정이 비장하다. 돌을 다루는 각법(刻法)이 예사스럽지 않음을 주목하게 한다. 힘이 넘치면서도 정교한 표현장식은 청동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추모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인지 어떤 인물상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까지 표현되어 있다. 동상작품에서 눈물방울까지 표현한 인물상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평양의 기념조형물 가운데 압권은 역시 만수대 대기념비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이 만수대는 평양의 상징일 뿐 아니라 북한의 상징이기도 하다. 만수대 언덕에 자리를 잡아 대동강 건너 동평양의 신시가지가 내려다 보였다. 조형물은 뒤로 조선혁명박물관 외벽에 백두산 천지 벽화가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그 앞에 유명한 김일성동상 그리고 양측에 인물군상(기발탑 부주제조각 군상)이 거대하게 서 있다. 이들 작품은 만수대창작사 조각창작단이 주축이 되어 제작한 집체작이다. 김일성주석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지난 72년 건립했다고 한다. 규모는 동상의 높이 20m, 기발탑 22.5m이다. 조각군상은 평균높이 5m에 길이 50m로 총연장 길이는 200m에 이른다.
평양은 기념조형물의 천지이다. 그것에 들이는 정성이 너무나 지극하다. 어떤 경우에는 조형성보다 주제의식이 너무나 앞서 자못 「위압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특히 미술인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집체작이라 하지만 중요 조소예술가들 개개인의 창작세계를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이 점은 「조선조각사」에서도 작가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다. 기념조형물에 대한 내용이나 의의 등은 자세히 설명했으나 참여 작가에 대한 부분은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미술책에서 작가 이름보다 다른 분야의 이름을 더 많이 열거되고 있음은 평양미술계의 한 특징인가. /글 윤범모(경원대 미술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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