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결산] 환란 책임소재 못가린채 '시들'
1999/02/10(수) 18:46
- 증인신문 마친 청문회 결산
환란(換亂)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경제청문회가 10일 증인신문을 마침으로써 끝마무리에 들어갔다. 청문회는 상당부분 검찰수사결과를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쳐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리는데 실패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강경식(姜慶植)전부총리 등 핵심증인들이 변명이나 책임회피로 일관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당시 경제팀의 정책혼선이나 늑장대응을 확인, 환란의 밑그림은 그려냈다는 분석도 있다. 청문회의 주요 쟁점을 되짚어 본다.
■환율정책의 실패
96년말과 97년초반 고평가된 환율을 실세화하지 못했고, 97년 한해동안 외환보유액중 260억달러를 환율방어 등에 소진하는 등 환율정책의 실패는 환란의 근인(近因)이 됐다.
이규성(李揆成)재경장관도 청문회 기관보고에서 『당시 환율정책이 없었다』고 지적했고, 당시 재경원 실무자들은 환율의 인상(평가절하)을 여러차례 추진했으나 청와대의 반대와 한국은행의 동조로 좌절됐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강전부총리나 이경식(李經植)전한은총재 등은 책임을 전가하거나 환율정책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소득 1만달러 유지를 위해 환율을 방어했다』는 항간의 의혹도 해소되지 못했다.
■외환위기 늑장대응
강전부총리와 이전한은총재, 김인호(金仁浩)전청와대경제수석 등 「환란 3인방」은 위기를 너무 늦게 인지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들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공식요청하기 10~20일전 위기를 감지했다고 증언했다. 강전부총리가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에게 IMF와의 협의가 필요하다고 보고한 것은 사실상 IMF협의를 시작하기 6일전이다.
김전대통령은 정규라인이 아닌 홍재형(洪在馨)전부총리의 전화를 받고서야 위기를 실감, 상황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나라 환란이 통상적인 외환위기와 다르다는 특수성을 인정하더라도 당시 보고채널에 이상이 있었으며, 핵심당국자들의 위기감지가 늦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강전부총리와 김전수석은 『외환위기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보고받은 바 없다』며 97년 3월부터 외환위기 경고를 묵삭했다는 일부 증언을 일축했다.
■IMF 구제금융신청 혼선
강전부총리와 김전수석은 자신들의 늑장대응은 불가항력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임창렬(林昌烈)후임부총리(현 경기지사)가 IMF행을 늑장발표하는 바람에 사태가 나빠졌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는 청문회에서 너무 불거진 사안중 하나. 임전부총리와 함께 임명됐던 김영섭(金永燮)전청와대경제수석도 『임전부총리가 취임때 IMF행을 부인하는 기자회견을 한데 대해 김전대통령이 「IMF로 가야 하는데…」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임전부총리는 『IMF와 협의가 있었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IMF행이 확정된 사실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전대통령이 청문회에 불참한데다 강전부총리와 임부총리의 대질신문 등이 좌절돼 IMF행의 공식발표가 왜 늦어졌는지 확인되지 못했다.
■기아사태 처리지연
기아사태 처리에 꼬박 100일이 걸렸다. 한보부도이후 김전대통령이 부도 노이로제에 걸려 부도처리에 부정적이었다는 증언이 나와 간접적으로 정치적인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 대통령긴급명령까지 검토했다는 강전부총리는 『당시 여러 여건상 부도후 법정관리가 어려웠다』고 증언했으나 구체적인 청와대 지시여부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기아사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삼성음모설」은 김선홍(金善弘)전회장의 증언으로 다시 부각됐으나 강전부총리나 삼성측의 부인으로 의문표만 남겼다. 김전회장은 『삼성의 기아 흔들기로 인해 97년4월이후 3개월간 종금사들로부터 5,500억원 가량의 단기자금을 회수당했다』며 『강전부총리와 삼성과의 유착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정경유착
재벌의 과잉투자와 이를 위한 과도한 차입경영은 환란의 원인중 하나로 꼽인다. 이같은 재벌의 행태는 정격유착에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 때문에 김전대통령이 92년 대선직전 정태수(鄭泰守)전한보그룹총회장으로부터 150억원의 대선자금을 건네받았다는 증언을 확보한 것은 김전대통령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성과로 평가된다.
명확히 입증이 되지는 않았지만 정치자금 제공의 대가로 한보철강이 산업은행으로부터 1,900만달러의 외화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었고, 이를 시작으로 5조원대의 막대한 금융지원이 한보철강에 이뤄졌다는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다. 반면 「김선홍 리스트」등 그동안 제기됐던 비자금 제공의혹은 이번에도 묻혀지고 말았다.
■기타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 선정과정의 비리나 종금사의 무더기 인허가 의혹 역시 검찰수사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종금사 인허가의 경우,
종금사의 부실이 환란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외압의혹 등이 집중적으로 제기됐지만 명쾌한 증언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감독소홀역시 감독권이 여러기관에 나눠져 있었다는 설명만 들었을 뿐이다.
한편 증언대에 나선 핵심증인들이 애매한 사안의 경우 김전대통령 등에게 답변을 넘기는 바람에 김전대통령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나 거의 불가능할 전망이다.
/정희경기자 hkjung @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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