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모교수`한미수교사'] 한미수교사 첫장을 찾았다
1999/02/02(화) 18:08
1883년 9월18일 조선 보빙사의 대표로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일행은 뉴욕 피프스 애비뉴 호텔 접견실에서 체스터 앨런 아더대통령을 보자 한국식으로 넙죽 큰절을 올렸다. 국서(신임장) 제정을 위해 우리 일행을 맞은 미국대통령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현지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초창기 한미수교사를 장식한 일화 중의 하나이다.
김원모 단국대 사학과 교수가 펴낸 「한미수교사」(철학과 현실사)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최초의 견미사절단인 조선보빙사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보빙사는 상대국에 대한 답례로 파견된 외교사절. 미국은 조약체결 이후 푸트를 초대 주한 특명전권공사로 임명, 비준문서를 교환함과 동시에 서울 정동에 상주공사관을 개설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국가재정이 궁핍해 미국에 상주공관을 설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푸트공사는 조선정부에 보빙사 파견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1883년 방미 사절단이 구성됐다.
이처럼 역사적인 방미활동이었지만 그동안 전해진 자료가 없어 사절단의 활동내용을 거의 알 수 없었다. 김교수는 81년 자신이 발굴한 「홍영식 복명문답기」를 바탕으로 그동안 개별적인 논문을 발표해 왔다. 이 책은 그동안의 논문과 미국측 기록, 당시의 미국 신문기사등을 분석해 새롭게 종합·정리한 것이다. 보빙사 파견을 결정하는 과정과 국서 제정식 장면, 사절단의 보스톤 뉴욕시찰, 문화·과학 교류활동, 당시의 조미 외교관계등을 모자이크처럼 맞추어 기술했다. 홍영식 복명문답기는 귀국한 홍영식이 고종에게 문답형태로 활동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한미 교섭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이다.
김교수는 당시 전권대신이었던 민영익과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원(수행원) 유길준 변수 고영철 현홍택 등 개인에 관해서도 살핌으로써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홍영식의 복명문답기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1만5,000원. 김철훈기자 chkim@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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