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김춘수 16시집 「의자와 계단」
1999/02/02(화) 17:53
김춘수(77)시인이 열여섯번째 시집 「의자와 계단」(문학세계사 발행)을 냈다. 끊임없는 시적 실험과 자아의 부정을 통해 우리 시에 「무의미시」의 새 영토를 개척한 노시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꽃」은 그 지평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번 시집은 극한적 언어실험으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적 자아를 탐색하던 그의 시가 커다랗게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유년시절의 기억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놀」, 「책」 등에서 그는 의도적인 실험의 형식을 배제하고 심정적인 시, 인간 감정에 기대는 따스한 시의 미학을 새삼 보여주고 있다. 「우물에는 하늘이 떨어져 있었다. 종잇장 같은 희디흰 하늘이다. 우물을 칠 때 제일 가슴 아팠던 것은 그 하늘이 깨져서 없어져버린 일이었다. 자라가 산다는 소문은 거짓말이었다. 물을 다 퍼도 자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먼 길을 누가 하염없이 가고 있었다. 길가 풀섶에서 찌 찌 찌 벌레가 울기도 했다. 엄마야 누나야 이사 가자. 키 큰 무지렁나무 그늘 아래로, 내 귀에는 왠지 그렇게 들렸다」(「책」중에서).
「의자와 계단」에서 이처럼 김씨는 『마음 가는 대로, 느끼는 대로 사물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이런 시들은 「만유사생첩」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발표한 50여편. 시집에는 또 「의자를 위한 바리에떼」「계단을 위한 바리에떼」 제하의 연작시를 포함해 66편이 실려있다. 「누가 나를 부른다/돌아보면 너무나 아득하다/내 키만한 수렁이 있고/그 언저리는 언제나 봄이다/…/낮달이 자꾸 나를 따라온다/나를 누가 기다리고 있다고」. 왜 「의자」와 「계단」일까. 김씨는 『의자는 나를 밀어내고 자기는 한갓 도구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무엇을 표상하는 기호가 아니라 무엇 그 자체라는 것이다. 계단도 그렇다. 아무리 올라가도 한계가 있다. 나는 어릴 때 어디까지 올라가면 내가 보고 싶은 것이 보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계단도 그 무엇을 표상하는 하나의 기호일까? 이런 것이 내 근래의 심정이다』고 말했다. 시집 말미에 실린 2편의 산문 「시인이 된다는 것」「자유, 꿈」에서 그는 이처럼 50여년 시작을 통해 갈고 닦은 언어연금술의 비밀을 펼쳐놓고 있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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