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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일제폭압 세계에 고발 '민족자결' 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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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일제폭압 세계에 고발 '민족자결' 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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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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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등 동아시아 전통국가들은 19세기 중반부터 제국주의외세의 거센 도전을 맞아 문호를 개방했다. 한국도 청나라 일본 러시아등 주변강국의 외압에 부딪혔고 전통국가의 개혁·정비를 통한 근대국가 건설노력은 갑신정변 동학봉기 독립협회운동 의병운동 실패등으로 실현기회를 상실했다. 그러나, 1919년 3월 강권·군국주의를 앞세운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한국에 비서구사회 최초로 근대민족주의의 대중적 운동인 3·1민족사회운동(이하 3·1운동)이 등장했다. 3·1운동은 비서구사회의 독특한 역사구조적 조건 하에서 이를 타파하기 위해 창출된 집합행동인 민족사회운동으로 이후 복합적 근대이행에 압도적 영향을 준 사건이다.3·1운동의 성격은 그 발생의 원인과 배경을 잘 이해해야 알 수 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지도자들이 국제정치적 요인과 국내사회적인 요인이 상호 연관될 때 독립이 가능하다는 자각에서 출발했다. 이는 이미 의병운동이라는 무력독립투쟁이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실패하고 무력항쟁의 한계를 인식한 상태에서 대내외적 조건이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사건과 때가 구비돼야 독립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는 원숙한 인식에 바탕한 것이다. 즉 우리의 독특한 조건과 상황에 맞는 운동으로 타개해야 한다는 인식인 것이다.

▦국제적 상황

1차대전으로 독일을 도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계획이 있었으나 이는 전략적 판단미스였음이 밝혀졌고 오히려 연합국측에 가담한 일본의 전후지위는 견고해졌다. 객관적으로는 국내외에서 일본의 입지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인류 공멸의 위기감을 고조시킨 「문명국」 간의 세계대전을 극복하고자 하는 분쟁해결과 평화정착의 노력이 서구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신조류를 주도한 미국 윌슨대통령은 1918년 1월 의회에 제출한 14개 조항을 통해 민족자결주의를 전후질서의 이념으로 제창했다. 윌슨의 선언이 동구 오스트리아_헝가리제국 치하의 소수민족들을 주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국 민족지도자들은 알았지만 실낱같은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디아스포라(이산형)

민족주의 1918년 11월 상하이의 한인독립단체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이 이런 국제정세를 파악해 즉시 국내에 김철 선우 혁을, 일본 도쿄(東京)에 조소앙을 파견해 독립운동을 고취했다. 또 12월 미주의 대한국민회는 파리강화회의에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3인대표를 파견키로 결정했고 이것이 외신을 타고 국내의 민족지도자에게도 알려졌다. 이후 다음해 2월말까지 약 3개월동안 국내외 민족지도자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해외에 분산된 디아스포라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불리함을 놀랄만한 노력으로 극복하였다. 주지하듯 상하이의 전갈을 받은 도쿄의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을 발표해 적의 심장을 강타했다. 이 소식은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계를 자극했다. 한편 여운형의 만주·노령 방문은 이 지역의 무오독립선언에 촉매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국내에서의 대중화한 민족운동의 실현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다.

▦최소 최대의 3원칙과 민족사회운동

투쟁과 저항으로 잔뼈가 굵은 손병희선생이 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를 주장한 것은 3·1운동이 19세기 농민봉기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의 운동이어야 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조선에서 대대적 저항운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비폭력 대중운동이 채택됐다. 20세기 서구문명의 신조류인 인도주의정신에 맞추어 비폭력 대중 민족주의운동(민족사회운동)을 조직하고자 한 것이다. 또 이를 위해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적 운동을 전개할 것에 양측 지도층은 적극 동의했다. 보수층과 유림의 참여도 시도했으나 불교층의 참여를 얻는 데 그쳤다.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3·1운동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폭력 평화적 저항운동이었다. 일견 달걀로 바위치기격인 비폭력운동은 사실 「최소강령에 의한 최대연합」을 형성하는 민족사회운동의 비결이다. 200만의 폭발적 참여를 기록한 3·1운동은 물론 인도 간디의 반영(反英) 불복종운동도 바로 민족사회운동이었다.

▦제국주의에의 창조적 대응

3·1운동은 1차대전 전까지 소수엘리트의 급진운동과 다수 민중의 전근대적 봉기로 양분된 한국 중국 인도등 아시아의 민족운동을 일약 대중운동단계로 끌어올렸다. 또 민족자결주의 원리를 군국주의 제국주의로 혼탁해진 국제사회를 바로잡을 보편주의, 인도주의적 이념으로 보편화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4월23일 13도 대표의 국민대회를 통해 선포된 한성임시정부는 이후 9월 통합상하이임시정부로 그 법통성이 이어져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3·1운동은 근대 서구문명의 핵심정신인 계몽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를 이해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취약성을 잘 파악한 손병희 이승훈 최남선등의 민족지도자들이 식민지, 반식민지상태에 놓인 아시아의 민족운동을 이후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천뛰시(陳獨秀)등과 함께 근대적 대중사회운동으로 재주조한 것이었다. 근대국가의 자기모순에 빠진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세력에 대한 비서구적 사회의 창조적 대응의 선구적 사례가 바로 3·1운동인 것이다.

3·1운동은 서구문명의 첨병을 자부하던 일본의 압제와 만행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한국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기정사실화」한 민족자결운동의 대사건이었다. 일제는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제암리사건을 통해 반문명적이고 반서구적인 세력임을 드러냈다. 4월 중순이후 일본에서 군대가 도착한 후 무자비한 진압으로 대중운동은 중지됐으나, 9월에 취임한 사이토 미노루(齋藤實) 2대총독은 식민통치의 실패를 인정,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선언하게 됐다. ◆3·1운동 연구서

이용락 「3·1운동실록」(금정·94년), 정광현 「재판을 통해서 본 삼일운동사」(법문사·78년), 켄달 「한국독립운동의 진상(1919)」(평민사·신복룡역·86년), 멕켄지 「한국의 독립운동(1920)」(〃),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동아일보사·69년), 구대열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_일제시기 한반도의 국제관계」(역사비평사·95년), 신용하 「3·1운동 발발의 경위」(지식산업사·77년), 이정식「한국민족주의의 운동사」(미래사·82년), 윤병석「한국근대사론」(지식산업사·77년), 한국역사연구회 「3·1 민족해방운동 연구」(청년사·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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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족사회운동인가

「3·1 민족사회운동」은 성신여대 김용직교수가 「3·1운동」 대신 도입한 개념이다. 풀어 쓰면 비서구사회의 민족주의적 대중사회운동을 말한다. 중국의 5·4운동, 간디의 반영 비폭력 저항운동등이 대표적 사례다.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반영 비폭력 저항운동은 비서구 문명사회의 독특한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발생한 민족사회운동이었다. 이들 운동은 19세기말 이후 서구문명의 제국주의적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서구 식민, 혹은 반식민사회의 근대화과정에서 발생했다…』

김교수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3·1민족사회운동은 역사적 배경에 기초해 보다 보편화한 개념인 것이다. 김교수는 이 개념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비서구사회의 민족운동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의 차티스트운동같은 서구의 사회운동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족사회운동이라는 말은 본래 미국 역사사회학자 틸리가 19세기 피지배자의 동의에 명분을 둔 대의제 서구 근대국가사회의 집단행동이라고 정의한 서구적 개념으로 회합 대회 행진 청원 시위 파업등의 형식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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