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청문회와 도덕적 불감증
1999/01/30(토) 21:09
매천야록(梅泉野錄)은 구한말 재야선비인 매천 황현(黃玹)이 외세의 침탈 속에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로 나라를 빼앗긴 통한의 역사를 생생히 기록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야사(野史)이지만 1864년(대원군 집정)부터 1910년(경술국치)까지 벌어진 근대사의 주요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 사료적 가치가 탁월하다. 특히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춘추필법의 자세로 객관적인 분석과 날카로운 비판을 곁들여 그 가치가 한층 돋보인다.
■과거에 합격하고도 타락한 벼슬 길이 싫어 전남 구례로 내려가 학문과 집필에 전념한 매천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 유명한 절명시(絶命詩)와 함께 남긴 유서에서 그는 자결하는 까닭을 이렇게 적었다. 『나라가 망했다 하여 반드시 죽어야 할 의무는 없으나 조선 500년동안 선비를 길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하는 날 선비로서 한 사람도 죽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선비로서의 도리.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도, 망하게 한 무능한 지배층도 아닌 그저 평범한 지식인에 불과한 그가 자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단지 이 하나였다. 선비라는 신분만으로도 무한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한말 치욕의 역사를 겪은지 100여년만에 닥쳐온 97년말 외환위기의 원인과 책임을 가리자는 경제청문회가 한창이다. 여러 면에서 비난도 많지만 환란의 주범으로 불려나온 과거 실력자들의 증언은 정말 꼴불견이다.
■국가경제를 파탄에 빠지게 한 엄청난 사태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을 인정하기는 커녕 반성의 빛도 보이지 않고 있다. 겉치레로 도의적 책임을 일부 시인하다가도 내용에 들어가서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른바 위정자라는 사람들의 무디디 무딘 도덕적 불감증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지식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죄의식을 느낀 매천선생의 칼날같은 역사의식을 이들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일이다. /배정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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