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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논단] '건달의 도시' 서울(정경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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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논단] '건달의 도시' 서울(정경희.언론인)

입력
1999.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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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논단] '건달의 도시' 서울(정경희.언론인)

1999/01/27(수) 18:05

400여년전 1570년대에 만들어진 런던의 옛지도를 애드리언 프록터라는 영국의 전자공학교수가 32쪽의 책으로 엮어낸 적이 있다(1980년). 이 지도에는 물론 지하철역은 없다. 하지만 이 지도책만 있으면 런던의 중심부는 어디든지 찾아다닐 수 있다.

『런던은 역사가 오랜 도시지만, 400여년 동안 모든 거리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게 프록터교수의 말이다.

400년 묵은 지도를 가지고 거리를 찾아 다닐 수 있는 도시 런던. 20세기 막바지의 서울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남의 얘기다.

5년전 서울은 「정도(定都) 600년」이라고 해서 요란하게 행사를 벌였다. 그러나 서울에는 「600년」을 증명할 만한 유산이 없다. 5대궁과 종묘,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비석과도 같은 동대문·남대문이 없다면 밀림을 밀어붙이고 뚝딱뚝딱 세운 아프리카의 신생식민도시와 다를 게 없다.

대표적인 예로 오백수십년의 역사가 흐르던 인공하천 청계천은 무지막지한 복개공사(58년)로 거대한 하수구가 됐다. 청계천은 1412년(태종 12년) 삼남의 장정 5만2,800명이 동원돼 한달동안 이룩한 600년전 도시계획의 유산이다.

그 위에 서있던 돌다리 「광교」도 지금의 조흥은행본점 앞에 생매장됐다.

이런 식으로 서울의 역사는 무지막지하게 죽임을 당했다. 대한제국이 내부(內部=내무부) 청사로 지은 광화문앞 2층 벽돌건물도, 3·1운동의 현장이었던 독특한 양식의 2층 기와집빌딩 「기독교 태화관」도, 몇군데 남아 있었던 2층 기와집 상가(商街)건물도 자취를 감췄다.

무엇보다도 서울에는 기와집이 없다. 가회동과 삼청동의 기와집 보존은 91년에 종말을 고했다. 160년전 기와집 양식이었던 운당여관은 헐려서 박제가 된채 종합촬영소의 세트신세가 됐다.

또 장안의 10대가(家)의 하나였던 박영효의 집은 헐려서 「남산골 한옥마을」의 전시품으로 전락했다. 덕수궁뒤 정동골목 이화여고의 담도 옛 정취를 잃었다. 진흙과 돌로 쌓았던 담은 최고 2㎙의 시멘트 담에 얹힌 장식물이 됐다.

이제 서울은 판자집양식의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집단이요, 자동차가 붐비는 공해천국이다. 거대한 빌딩은 서울을 지배하는 돈의 제왕(帝王)들이다. 서울은 돈밖에는 가진 게 없는 졸부의 도시요, 국적이 없는 「건달의 도시」가 됐다. 그 한 가운데에 인사동이 있다. 전통문화가 살아 있다고 해서 「문화특구」지정운동이 있었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흔히 찾는 관광코스다. 하지만 이런 관광객들이 안쓰럽다.

전통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개방식 공방(工房)도, 판소리공연을 보면서 불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와집 식당도 없다.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고서(古書)도, 번듯한 기와집도, 하다못해 한뼘 크기의 녹지공간도 없다.

오는 4월 하순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내외가 서울에 온다. 한국과 영국의 국교회복 50주년 기념이라는 큰 뜻이 담긴 한국방문이다. 이 때 여왕은 인사동과 남대문시장을 걸어서 구경할 작정이라고 한다. 남대문시장에서 여왕은 한국사람들의 체취와 문화, 그리고 왕성한 성취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와집도 없는 인사동에서 무엇을 볼까?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느낌이다.

박영효의 집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던 서울시가 그것을 털어 남산골로 옮기는 행정의 폭력, 청계천을 하수구로 만드는 무지막지한 권력, 돈에 눈이 어두워 문화유산을 헐어버리는 졸부와 행정의 무책임을 시민이 나서서 다스려야 한다. 경제는 거덜이 나도 역사와 문화를 지킨다면 자긍심을 지킬 수 있다. 철학자 니체의 말을 기억해 두자. 『노예는 위대한 것을 추구할 줄 모르고, 현재의 것 이상으로 존중해야 할 과거와 미래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과거를 잊은 사람은 노예와 같다. 「한국」이 사라진 수도 서울에 「한국」을 되살려야 한다.

정경희 鄭璟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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