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판사는 명예를 먹고 산다
1999/01/27(수) 17:11
정진경 鄭鎭京 북부지원판사
최근 대전변호사 수임비리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를 보면 국민들이 판사전체를 뇌물판사, 법원전체를 비리집단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법원에서 10여년간 일해 온 판사로서 법조비리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있는 전관예우 문제의 실체와 판사의 생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전관예우의 의미가 판·검사출신 변호사가 피고인의 변호를 맡았다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공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사법의 본질에 관한 심각한 문제로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일부 언론이 들고 있는 전관예우 주장은 변호사들의 형사수임사건 중 전직 판·검사출신 변호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통계를 보면 수임건수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변호사는 대부분 검사출신이다. 검사출신 변호사가 어떻게 판사에게 전관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법원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근무했더라도 퇴직 후 브로커를 고용하지 않으면 형사사건을 수임하기 어렵고 심지어 판사가 가까운 친척에게 변호사를 추천해도 브로커가 접근해 사건을 「빼앗는」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은 법조계에서 널리 알려진 얘기다.
결국 전관예우로 인한 사법불신의 근원은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불신풍조와 이에 가세한 법조주변 브로커의 암약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전관예우문제는 브로커의 척결과 불구속수사의 확대, 형사사건에서 피고인의 기본적 국선변호화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 극히 비정상적인 사회속에서 살아왔다. 어느 조직이든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법원 역시 그러한 상황속에서 완전하게 책무를 수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판사라는 직업은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화려한 자리가 아니다.
엄청난 업무량과 기대에 못 미치는 보수, 도덕적 생활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과 기대에 시달리면서도 대부분의 판사는 국민의 봉사자라는 사명감 하나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대부분의 판사들이 일반 직장인의 생활에 비해 별로 나을 것이 없다. 한창 일할 나이의 중견법관이 퇴직하는 것은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서이다.
유능하고 실력있는 중견변호사들이 판사로 오지 않는 이유는 법원이 폐쇄적이어서가 아니라 일에 비해 판사의 보수가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기록검토와 판결문작성을 위해 밤 늦게까지 일하는 날이 부지기수고 건강을 돌 볼 겨를도 없이 업무처리에 열중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업무량이 많다.
그러나 정작 판사들이 참기 어려운 것은 근거없는 명예의 훼손이다.
과다한 업무나 경제적 어려움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도 판사로서의 명예와 자긍심이 무너지면 단 하루도 판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은 모든 판사들의 한결같은 생각이다.
학식과 덕망을 갖춘 훌륭한 판사로부터 친절하고도 공정한 재판을 받는 것은 우리 국민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법원을 갖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한풀이식 비난이 아니라 법원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지지, 제도의 개선을 위한 합리적인 비판과 토론이다.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가 청산되고 민주화의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합리적인 사회의 권위마저 부정되는 사례가 확산되고 있다.
권위와 명예없이는 존립하기 어려운 법원을 확실한 근거 없이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마치 민주화의 일부인 양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고다.
법원의 권위가 무너지고 사명감 하나로 버티는 유능한 판사들이 모두 떠나면서 판사라는 직업이 달리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적당한 타협을 통하여 돈을 버는 자리로 전락한다면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로서의 법원의 기능은 마비될 것이고 이는 결국 국민 전체의 불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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