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생 집자비] 세밀…정교… 김생연구 결정적 사료
1999/01/26(화) 18:17
- 정상욱씨 발굴 포천 '김생 집자비'
정상옥(鄭祥玉·53) 전 계명대교수가 경기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에서 발굴한 김생(金生·711~790년) 집자비는 금석학사를 새롭게 장식할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백월비·954년)가 김생의 글씨를 새긴 유일한 석각(石刻)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김생의 필체로는 백월비와 함께 목판본인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書)와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 경주 백율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등이 전하지만 각각 초서와 해서체여서 김생의 서체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학계는 김생체의 본류인 행서체의 백월비를 절대적 위치에 놓고 여러 학설을 전개해 왔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각첩(刻帖)이나 각본(刻本)에 전하는 필적은 대부분 백월비의 글자를 집자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필체가 아니라는 식이다.
이번 발굴로 백월비 이후에도 김생 연구의 결정적 사료가 되는 새로운 집자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포천 집자비도 백월비로 집자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백월비에 필적하는 새로운 집자비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새겨진 글자가 1,800여자나 된다. 2,500여자가 새겨진 백월비의 글자로 포천 집자비를 모두 새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금석학자들의 의견이다. 정상옥씨는 『새로운 집자비가 백월비를 참고했을 수도 있지만 당시 민간에 널리 유포된 김생의 진적(眞蹟)을 수집해 집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포천 집자비의 서체는 백월비와 일치하지만 글자모음에서는 백월비보다 더 세밀하고 정교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백월비 유일론」의 입장에 섰던 원로서예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73)씨는 『김생의 집자비가 틀림없다』며 『집자비가 하나 더 늘었다는데 큰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명필 김생은 왕희지(王羲之)를 모태로 독창적 서체를 구사, 중국인들로부터도「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숭상받았다.
그러나 세상에 전해진 필적은 그리 많지 않아 954년(고려 광종5년)에 그의 글씨를 모아 새긴 백월비가 세워진 뒤에야 필적이 널리 전파됐다.
포천 집자비를 발굴한 정씨는 동국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동 교육대학원 한문학과(석사)와 중국 산둥(山東)대 대학원(박사)에서 학위를 받은 서법학자이다. 그는 발굴내용을 정리, 곧 학계에 발표할 계획이다.
/김철훈기자 chkim@hankookilbo.co.kr
(C) COPYRIGHT 1998 THE HANKOOKILBO -
KOREALINK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