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청와대] 노씨조사 뒷얘기
1999/01/25(월) 11:33
노씨의 소환을 앞두고 검찰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예우와 경호문제였다.
수사팀이 조사실에서 부를 노씨의 호칭으로 고려했던 것은 「각하」「전대통령」「대통령」「피의자」등 4가지 정도.
검찰 관계자의 기억. 『우리도 경험이 없지 않습니까. 참 고심을 많이 했어요. 각하는 극존칭 아닙니까. 수사하는 우리를 발아래로 낮추는 표현은 사용할 수가 없었어요. 피의자도 예의는 아닌 것 같고…. 결국 대통령으로 낙착되었죠. 대통령은 직함이니 평가의 의미가 없잖아요』
검찰의 두번째 고민은 식사문제. 한 검찰간부의 기억. 『우리가 준 밥을 먹고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해외토픽에 날 일이죠. 수뇌부에 식사는 절대 제공해선 안된다고 건의했어요. 연희동쪽에는 식사도 그쪽에서 준비하라고 말했지요. 국가원수의 해외순방때는 물도 본국에서 공수해 가는게 외교관례 아닙니까. 마찬가지 이유죠. 최석립전경호실장을 식사시간에 배석시킨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을 대비해 우리에겐 「증인」이 필요했던 거죠』
경호문제는 검찰로서도 민감한 문제였다. 검찰은 대선직후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이 조사를 받으러 오다가 언론사 카메라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린 「악몽」이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포토라인」(사진촬영 선). 외국에선 이미 관행화했지만 우리에겐 생소한 광경이었다. 청사건물 정문 출입구 양쪽에 노란색 테이프가 5㎙간격으로 둘러쳐졌다. 덕분에 노씨는 200여명의 내외신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물리치고 수월하게 현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비자금 사건은 포토라인을 관행으로 정착시킨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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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사건 당시 연희동측을 괴롭혔던 소문은 소위 「안방비자금」의 존재여부였다. 검찰내부에서도 안방 비자금과 비자금 장부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연희동 자택을 수색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됐다. 결론은 불가(不可)였다.
검찰 고위 간부의 회고. 『사건이 바로 터진 후 압수수색을 했으면 몰라도 비자금 장부까지 파기한 마당에 뭘 놔뒀겠어요. 전직대통령을 잡범처럼 취급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대통령을 조사하면서 부인까지 조사하는 것은 국민정서에도 맞지않아 아예 수사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어요』
문영호지청장의 이야기. 『우리도 안방비자금을 의심했어요. 하지만 압수수색은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문제도 있고 국가체통에도 관계돼 포기했어요.
또 만약 뒤졌다가 「물방울 다이아」나 기밀문서라도 나오면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튈 수도 있다는 반대의견이 우세했습니다. 부인의 계좌를 추적하지 않아서 안방비자금의 존재여부는 모르겠어요. 노씨의 비밀계좌에서도 안방으로 흘러간 돈은 없었습니다』
검찰은 안방비자금 문제는 함구로 일관했다. 수사기록상 희미하게 남아 있는 미스터리 한 토막. 수사기록에는 김용산(金用山)극동그룹 회장이 『89년 12월 하순 금진호(琴震鎬)씨에게 50억원을 전달할 때 금씨가 부인을 청와대에 보내 돈을 전달하겠다고 말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돼있다. 금씨의 부인인 김정숙씨는 노전대통령의 부인인 김옥숙(金玉淑)여사의 친동생. 하지만 검찰은 이 돈이 누구에게 전달됐는지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비자금 사건 재판에 관여했던 한 변호사의 회고. 『제가 알기로는 그 돈은 일단 안방에 전달된 걸로 알고 있어요. 최종적으로 노씨에게 전달됐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검찰은 노전대통령이 받은 것으로 정리해 기소를 했더군요』
검찰 관계자의 기억. 『김회장의 진술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노씨가 김회장에게 돈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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