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부-한은 "환란 네탓" 공방
1999/01/19(화) 23:33
우리나라 금융·외환정책의 한 축을 떠맡고 있는 한국은행이 외환위기 책임의 상당부분을 재정경제원(현 재정경제부)으로 돌리고 나서 파문이 일고 있다.
한은은 19일 국회 청문회자료에서 『외환위기 발생가능성을 경고한 보고서를 여러차례 정부에 제출했으나 묵살당했다』며 「재벌·금융기관은 원죄(原罪), 재경원은 유죄(有罪), 한국은행은 무죄(無罪)」란 논리를 폈다. 이에 대해 재경부는 「보고서 몇장으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발상」이라며 강력 반발, 청문회가 본격화하기도 전에 피조사기관간 책임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두 기관은 환란(換亂)책임규명의 단서가 될 몇가지 부분에서 커다란 진술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환율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를 과다 소진한 문제. 한은은 『97년초부터 환율을 시장수급에 맞게 상승시킬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한 반면 재경부는 『환율상승에 대해 한은이 오히려 소극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은은 또 『시장개입은 재경원과 사전협의로 이뤄지며 특히 10월이후 시장개입에 반대했으나 재경부가 직접 지시했다』고 밝혔다.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은 외환위기 감지시점과 관련된 「3·26 보고서」공방. 한은은 한보사태이후 외환사정이 급속히 악화하자 위기가능성을 인지, 97년3월26일 「상황이 악화할 경우 IMF등 국제기구로부터의 비상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재경원에 제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경부 실무자는 『이같은 보고서를 본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둘중 한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중도에서 보고서가 「증발」된 셈이다.
한은관계자는 『보고서 3부를 재경원 고위관계자에게 주면서 장·차관에게 1부씩 전달해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강만수(姜萬洙)당시 차관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강경식(姜慶植)당시 부총리도 그런 보고서 얘기는 한적이 없다고 한 측근은 전했다. 따라서 현재로선 어느 쪽 얘기가 옳은지 불분명하다.
보고서가 전달됐더라도 보고서를 받은 재경원 고위관계자가 장·차관에게 올리지도 않고, 실무진에게 검토지시를 하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또 수없이 올라오는 보고서의 「홍수」속에서 장·차관이 흘려 넘겼거나 봤더라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사실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비록 IMF 구제금융문제가 「최초」로 언급됐다고는 하나, 한은도 일반론적으로 언급했을 뿐 결코 심각한 톤으로 건의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차피 양측의 진술차는 청문회과정을 통해 규명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환란책임에 대한 양측의 태도다. 재경부든 한은이든 환란의 1차 책임을 정책당국의 실패 보다는 재벌의 차입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경영쪽으로 돌리고 있다. 특히 재경부가 전날 마지못해 『정책책임을 인정한다』고 밝힌 것과는 달리, 한은은 「우리는 할 일을 다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비록 위기가능성을 「경고」했고 시장개입에 「반대」했다해도, 그 강도는 미미했고 결코 정책당국으로서 위기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한은이 지나치게 「면피」주의로 일관하고 있다는게 일반적 지적이다. 이성철기자 sclee@hankookilbo.co.kr
(C) COPYRIGHT 1998 THE HANKOOKILBO -
KOREALINK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