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청와대] (72) 노태우 비자금사건
1999/01/17(일) 17:18
법은 도덕이라는 외피(外皮)를 입는다.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은 「돈을 받았다」는 뇌물수수죄로 처벌됐지만 국민들은 「돈을 남겼다」는 부도덕한 행위에 더 많은 분노를 느꼈다.
96년 1월15일 서울 서초동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비자금사건 2차 공판. 변호인단은 예상과 달리 「반대신문」을 포기했다. 노씨를 변호할 유일한 기회를 스스로 물리친 것이다. 문영호(文永晧)중수2과장이 피고인 노씨에게 다짐을 받아내려는 듯 거세게 몰아붙였다.
(문과장) 『반대신문을 포기하겠다는 것은 기업인에게서 받은 돈이 뇌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노씨)『모든게 내 책임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법정이 사실과 진실을 밝혀 정확한 판단을 내려 주길 바랄 뿐입니다』
(문과장) 『그렇다면 뇌물이 아니라는 겁니까』
(노씨) 『(얼굴을 붉히며) 뇌물이라고 밝힌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성금으로 받은 것이지만 기업인들이 뇌물이라고 한다면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과 「진실」. 노씨의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연희동 진영에선 지금도 사법처리를 통해 사실은 밝혀졌지만 이면의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반응이다.
서동권(徐東權)전안기부장의 이야기. 『그 양반이 축재하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검찰입장에서야 축재했다고 해야 뇌물수수죄가 되니 그리 몰고 간 거죠. 통치자금을 모은 것은 잘못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땐 관행이었어요. 그걸 깨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지요』
6공 당시 청와대의 핵심요직을 했던 모인사 이야기는 더 구체적이다. 『대선을 한 번 치루려면 국가전체로 볼 때 조(兆)단위의 돈이 들어갑니다. 그게 우리의 정치현실입니다. 정치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회전체가 공동책임을 져야죠. 당시엔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모았어요. 여당 관리비용의 80% 정도를 청와대에서 대통령 혼자 힘으로 조달했고 야당관리도 해야 했어요. 또 대통령이 의원들을 부르면 반드시 봉투를 줘야 하는 것도 관례였지요. 왜 대통령이 창구를 단일화해서 혼자 책임을 졌는 지 생각해 보세요. 부정부패를 예방하기 위해서였어요.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대엔 처음에는 당에서 정치자금을 모으다가 중앙정보부까지 개입해 부작용이 컸지요. 그 다음 시절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중심이 돼 돈을 모으다 나중엔 당·경제부처·청와대로 3원화 됐어요. 소장파 장교였던 전두환(全斗煥)·노태우씨는 권력핵심부에서 근무하면서 권력내부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본 겁니다. 전씨는 정권을 잡자 「정치자금은 내가 모으겠다. 너희는 일만 열심히 해라」고 했어요. 정치자금을 대통령이 책임지면 아래는 깨끗해질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노씨도 마찬가지였어요. YS는 반대로 대통령만 깨끗하면 전체가 맑아질거라고 했지만 과연 그렇게 됐나요. 시대상황을 거두절미하고 「돈이 남았다」는 결과만으로 「부도덕한 지도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정당한 평가라고 볼 수 없어요』
96년 1월30일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3차공판. 피고인 노씨에게 재판장인 김영일(金榮一)부장판사가 직접 이문제를 물었다.
(김부장판사)『퇴임시에 어떻게 그렇게 많이 남을 수 있습니까』
(노씨) 『그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김부장판사) 『「(줄)시기를 놓쳤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노씨) 『그렇게 많이 남아 있는 줄 몰랐습니다. 갑자기 중립내각이 구성돼 돈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고민 많이 했습니다. 언젠가 쓸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3년여가 흐른 지금도 이사건은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180도 다르다. 연희동진영 인사들은 지금도 「부정축재」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정해창(丁海昌)전 청와대비서실장의 증언.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세요. 통치자금을 규모있게 쓰다보니 상당액이 남았는데 넘겨주지 못했어요. 밀린 돈 갚는 것처럼 신임 대통령을 찾아가 내가 이런 돈이 있는데 내놓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본인이 남은 여생에 써봐야 얼마나 쓰겠어요. 그 양반이 매일 몇 억씩 써도 다 못쓸 돈 아닙니까. 부정축재라는 건 말이 안돼죠』
연희동인사인 한영석(韓永錫)변호사의 이야기. 『대선자금으로 주려고 돈을 모았지만 중립내각으로 가는 바람에 다 주지 못해 남은 것이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중립내각을 이유로 든 노씨의 해명도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문민정부 당시 청와대 고위직에 있었던 K씨의 이야기. 『중립내각 때문에 YS에게 줄 돈을 못 줬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YS측에서 얼마나 달라고 했는데요. 주려고 마음먹었으면 언제든지 줄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시 수사에 참여한 검찰 관계자의 증언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노씨가 퇴임 후 가져 나온 돈을 한 푼도 손대지 않은 걸 알고 좀 놀랐습니다. 압수한 통장을 보니 퇴임후 한 번도 거래한 내역이 없는 깨끗한 상태였어요. 그때까지는 자기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노씨는 정말 돈에 대해선 개념이 없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통장이 몇개인지 조차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요. 노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군에 입대한 사람 아닙니까. 장교로 임관한 이후에는 부관들이 다 알아서 하니 직접 주머니 돈을 쓸 일이 없었을거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말할 필요도 없죠. 남은 비자금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를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도 들더군요』
안강민(安剛民·현 대검형사부장)중수부장의 평가. 『노씨가 그 돈을 주머니에 넣으려 한 것은 아닌 듯 싶어요. 이실장에게 맡겨놓고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물론 전씨에게 배운대로 생활보장책으로 모아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입장에선 그 돈을 보관하고 사용한 것이 문제라기 보다 거둔 자체가 문제였어요』
그러나 김기수(金起秀)당시검찰총장은 『남긴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그건 전형적인 부정축재가 아닌가』라고 단호하게 얘기하고 있다.
또 다른 검찰관계자의 말. 『비자금은 법적용어가 아니지요. 성격규정을 하기위해 발표문에 부정축재라는 표현을 쓴 겁니다. 전형적인 부정축재라곤 할 수 없지만 돈을 걷어 손에 쥐고 있으면 그게 부정축재지요』
다시 96년 비자금 사건 3차 공판. 감정이 격해진 노씨는 김부장판사에게 『좀 더 설명하게 해달라』며 잔액의 용도를 설명했다. 『재임시 통일에 가장 관심이 많았습니다. 독일 통일문제를 보면서 비용이 엄청나게 든다고 생각해 통일에 대비해 사용할 방안도 생각했습니다. 또 북방정책을 위한 연구소 뿐 아니라 기업이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선도하는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또 이 정권이 끝나면 보혁(保革)의 대립이 심각해지고 엄청난 혼란이 야기될 것 같기에 건전한 보수세력을 지원할 것도 생각했습니다만 금융실명제가 실시돼…』
6공 인사들에 따르면 노씨는 퇴임 이후 별다른 계획이나 정치적 미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퇴임 이후 노씨의 활동 중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각국의 전직 최고통치자들의 모임인 전직국가원수회의(IAC 또는 OB Summit) 정회원이 된 것. 가교 역할은 6공 당시 경제수석을 했던 김종인(金鍾仁)씨였다. 김전수석의 이야기.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노대통령에게 「퇴임이후 존경받는 대통령이 돼달라. 퇴임하면 해외활동이나 하는게 좋겠다」고 건의했지요. 마침 슐츠 미 국무장관이 92년 말 한국에 왔을 때 그쪽에 권고해 보겠다고 제의를 하더군요. 그래서 다리를 놔 드린 겁니다. 노대통령도 이 활동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6공 고위직에 있었던 S씨의 이야기. 『전두환전대통령은 퇴임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당시 모수석이 전씨에게 보고서를 가져다 주었는데 그 제목이 뭔지 압니까. 「퇴임후 영향력 보존 계획」이었어요. 상왕(上王)이 되려했던 거죠. 일해재단도 그래서 만든겁니다. 그런데 노씨는 이상하리만큼 퇴임 후 계획이 없었어요. 영향력 유지니 하는 것에도 큰 관심은 없는 것처럼 보였구요. 단, 아들을 정치적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의도는 있었어요』
건전한 보수세력을 지원하려했다는 노씨의 발언은 당시 정치인으로 변신했던 재헌(載憲)씨의 정치적 장래와 관련해 많은 추측을 낳았다. 문민정부에서 청와대고위직에 있었던 모인사의 이야기. 『노씨가 아들 재헌씨를 봉(鳳)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얘기는 시중에 널리 퍼져있었어요. 조직은 정당이라는 틀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죠. 보수 우익정당이라는 이야기도 그런 맥락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에대해 연희동 진영은 지극히 냉소적이다. 김유후(金有厚)변호사의 이야기.『그건 김현철(金賢哲)씨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사람을 정치하자고 불러들인게 현철씨 아닙니까. 노전대통령이 법정에서 보수정당 이야기를 했지만 그건 재헌씨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정권 대물림이라는 건 우리나라에선 국민정서상 용납되기 힘든 일이죠. 북한의 김일성(金日成)부자나 할 수 있을까…』
6공 참모들은 노전대통령이 왜 비자금을 왜 남겼으며 어디에 쓰려했는지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도 이 문제에 관해선 묻지 않는다고 전한다. 역사의 진실을 알기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일까. 이태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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