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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씨] 김정일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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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씨] 김정일에게 보내는 편지

입력
1999.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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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씨] 김정일에게 보내는 편지

1999/01/16(토) 18:29

김정일지도자 동지께.

저는 남한의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입니다. 저의 성향이나 동태는 북조선당국에서도 비교적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글을 올리는 것은 남한체제가 생산한 의식을 글로 형상화(形象化)하는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지도자동지의 보호아래 있는 한 인민의 아들로서입니다.

지금부터 49년 전에 서른여섯의 한 젊은 가장(家長)이 만삭의 아내와 어린 사남매, 그리고 늙은 어머니를 적점령지에 내버려두고 이상의 공화국을 찾아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젊은이는 여든다섯의 고령(高齡)이 되어 자신이 떠날 때보다 훨씬 더 나이먹은 남쪽의 아들에게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그는 함경북도 어량군 부호리에 거주하는 이원철(李元喆)이고 그의 아들은 바로 저입니다.

마침 인편이 있어 급작스럽게 쓴 듯한 쪽지같은 안부편지였습니다만 어찌 아버님께서 아시고 싶은 게 단순한 안부였겠습니까. 저는 그 행간(行間)에서 살아 생전의 저희를 한 번 보고 싶어 하시는 아버님의 애절한 심경과 아울러 지도자동지의 인민으로 자란 낯모르는 아우들을 저희와 이어주시려는 염원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게는 아버님의 애절한 심경과 염원을 달래드릴 길이 없습니다. 50년이나 남한체제에 적응하면서 기른 내 의식은 불행히도 사회주의 이상과 일치하지 못했고, 이 점 북한당국에서도 일찍부터 주지하고 있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지금 철저하게 선별적으로 이루어지는 방북이 제게도 허용되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사사롭고 은밀한 방법으로 아버님을 만나는 길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감격스럽게도 이 사회 이 체제가 제게 베푼 것은 언제나 제가 바친 것보다 많았습니다. 그런 믿음과 아낌을 받아온 제가 어떻게 떳떳하지 못한 뒷거래로 제 사사로운 감정을 달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외람된 줄 알면서도 지도자동지께 직접 글을 올려 배려와 선처를 요청합니다. 어찌 보면 이 또한 사사로운 방법일 수 있겠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형태의 이산이란 고통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이 땅에만 남아 있습니다. 잘못이 어느 편에 있든 천만이 넘는 이산가족이 아직까지도 슬픔과 그리움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양편 모두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일입니다.

지도자동지께서 영단을 내려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신다면 그 사는 곳이 어디이든 그들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것은 감히 지도자동지께 저만의 특전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영단의 한 계기가 되기를 비는 마음에서입니다. 저의 방북이 허용될 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고통을 안고 있는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지도자동지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남한은 한때 왕조시대의 체제 방어수단인 연좌제를 채택했습니다. 그 연좌제의 그늘에서 젊은 날을 보낸 탓으로 위축된 의식은 통일이나 이산가족문제에 나를 선뜻 내던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 또한 자신의 나약함이나 둔감을 변명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같아 새삼 부끄럽습니다.

-1999년 1월15일 이문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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