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론] 브라질서 또 실패한 IMF(이찬근 인천대교수)
1999/01/15(금) 18:27
브라질의 외환위기 가능성은 지난해 8월 러시아가 부분적인 모라토리엄(대외지급유예)을 선언했을 때 이미 강력하게 지적되었다. 러시아 국채투자로 크게 손실을 입은 미국 월가의 투기자본이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새로운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각기 국내총생산의 8%와 4%에 달하는 브라질의 재정적자와 경상수지적자, 그리고 고질적인 인플레 퇴치를 이유로 달러화에 페그되어온 레알화의 인위적인 고평가는 투기자본의 공세를 유인하기에 충분한 조건으로 여겨졌다.
미국과 IMF는 전례없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동아시아 위기사태 때에는 뒷짐을 지고 위기당사국의 구조조정을 촉구했던 태도를 일변하여 미국은 지난해 9월말 이후 3차례에 걸쳐 총 1.5%포인트에 달하는 금리인하를 단행했고, IMF는 총 415억달러에 달하는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서둘러 결정했다.
브라질은 중남미 경제의 40%를 차지하면서 지역경제의 안정에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고, 중남미는 미국의 뒷마당이자 수출시장의 5분의1을 차지하고 있기에 미국은 불길을 서둘러 잡아야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미국금융의 총사령탑인 루빈재무장관은 동아시아에 적용했던 선(先)구조조정 약속-후(後)구제금융제공의 전략을 브라질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이른바 예방전략에로의 선회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연초 발생한 브라질의 대규모 외자이탈사태와 연이은 평가절하조치는 사전예방전략의 실패를 입증했다. IMF프로그램은 그것이 예방적인 것이건 사후적인 것이건 유효성에 큰 결함이 있음을 드러냈다. 우리나라에 적용한 사후처방은 IMF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수준의 경기침체를 수반했고, 인도네시아에서는 무모한 재정간섭으로 민중폭동을 초래하면서 정권을 교체시켰다.
IMF의 브라질 프로그램은 무모하리 만큼 현지사정을 도외시했다. 가뜩이나 국제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경기가 위축되고 있던 상황에서 시행한 강도높은 예산삭감조치는 의회와 지방정부의 정치적 반발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고, 설사 재정긴축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이로 인한 불황의 심화는 오히려 투기자본에 의한 신뢰의 게임을 부추길 소지가 컸다.
브라질 사태는 당분간 현재진행형이다. 일부에서는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중 단기외채 비중이 불과 15%수준이라는 점, G7의 진화의지가 유례없이 강력하다는 점 등을 들어 위기사태가 조기에 수습되리라는 전망을 하고 있지만 92년의 영국, 94년의 멕시코, 97년의 태국이 그러했듯이 일단 환율의 페그시스템이 흔들리고 나면 외환시장의 불안을 지속되게 마련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수출상품의 구조가 비슷한 중남미 국가들간에 평가절하경쟁이 유발돼 세계경제 불안이 가중되고 급기야 미국의 장기버블이 파열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1년간 뼈를 깍는 구조조정을 단행해 왔다. IMF의 주문대로 내부결함을 철저히 치유하면 아무리 외부조건이 동요해도 버틸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였다. 그러나, IMF관리체제하에서도 투기자본의 광폭성에 휘몰리고 있는 브라질의 사정은 우리에게 중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최소한 한시적으로라도 미국과 IMF가 밀어붙이는 자본자유화를 우리의 필요에 의해 유예할 수 있어야 한다. 투기자본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신뢰의 게임이 작동하는 한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개혁조치 보다는 경제의 활발한 운행이 궁극적으로 대외신뢰의 근거가 되는 것이므로 유사시에는 자본의 유출입을 통제하면서 국내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해야 한다.
1947년 이후 무역및관세에관한 일반협정(GATT)이 주도한 무역자유화도 개도국에 대해서는 다각적인 유예조치를 인정했듯이, 자본자유화 역시 세이프가드를 허용해야 한다. 위기당사국들의 뜻을 모아 이를 개진하는 것은 구조조정 못지않게 중요한 절대절명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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