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논단] 본관 529호실
1999/01/06(수) 18:38
지난 1년동안 날이면 날마다 싸움질만 해온 국회가 결국 전쟁상태에 돌입했다. 토론하고 타협하는 자리가 아니라, 적과 적이 맞붙은 전쟁터가 됐다.
사사건건 싸울 일도 많더니 전쟁의 방아쇠는 국회본관 529호실이다. 그것은 가위 「국회쿠데타」라고 할만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여당의원들이 퇴근한 뒤, 언론사 기자들의 접근을 막고, 의원총회를 하다말고 529호실에 몰려가 망치와 드릴로 열고 들어갔다.
성공한 쿠데타에는 으레 이유와 명분이 있게 마련이다. 529호실을 뚫고 들어간 한나라당도 이유와 명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나라당이 탈취한 안기부 문건이 불법적인 「정치사찰」을 입증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여당은 529호실을 망치와 드릴로 열고 들어가 국가기관의 문서를 탈취한 「불법」을 문제삼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그런 「불법」을 무릅쓴 데에는 그럴만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불법적인 정치사찰을 입증하는 문건이 529호실에 있다는 정보-안기부 연락관의 가방이 바로 「그것」이라는 정보를 믿고 단행했을 것이라는 보도는 신기하기만 하다.
한나라당은 지금 「정치사찰」을 성토하고 「김대중정권」이네 「집권층」이네 하는 말을 쓰고 있다. 이회창총재는 「자유민주」를 지키기 위해 529호실에 밀고 들어갔다고 했다.
이런 말들은 과거 폭력과 공포로 이 나라를 다스렸던 군사정권에 대해 민주원칙의 회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썼던 말이다. 40년 가까운 집권세력의 유산상속자인 한나라당은 피와 한숨이 어린 민주화운동의 유산에 무임승차를 시도하는 것과 같다.
문제의 529호실은 한나라당이 집권당이었던 김영삼정부때 만든 시설이었다. 한나라당은 그것이 언제 만들어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쓰여졌는가가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영삼정부때엔 정치권에 대한 정보수집을 안했단 말인가? 『안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김현철-김기섭사건때 전해진 말로는 김영삼대통령이 정기적으로 안기부의 정보보고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부시대통령도 잠이 안올 때면 정보보고를 읽었다고 한다. 96년 미국에서 대통령선거가 있기 직전의 일이었다. 연방수사국(FBI)의 백악관파견 근무 요원이었던 개리 앨드리치라는 사람이 클린턴대통령의 엽색행각을 폭로하는 책을 써서 파란을 불러 일으킨 일이 있었다.
따져야 할 것은 정보수집 자체보다는 그 방법의 적법성이요, 그 정보가 협박과 정치공작에 악용되는가 하는 것이다. 유신정권이래 역대 군사정권들은 불법도청이나 노골적인 밀착감시를 통해 민주화요구를 압살하려 했다. 정보수집이 아니라 협박성 사찰이었다. 폭력적 탄압이 허용될 수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정보수집자체가 정치사찰이라고 간단히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 경계선은 정부를 포함하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 보다 분명히 정립돼야 할 일이다.
「정치사찰」주장은 자칫 내가 하면 정보수집이고, 남이 하면 정치사찰로 둔갑하는 요술방망이가 될 수있다. 한나라당이 과거의 집권당으로서 정치적 실패와 국가적 부도에 대해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눈꼽만큼이라도 느낀다면 법안심의라는 본연의 임무에 보다 충실해야 할 것이다.
529호실에 대한 의혹도 토론과 타협이라는 정도(正道)를 통해 풀었어야 했다. 그런 뜻에서 망치와 드릴이 동원된 「529호실의 활극」은 분명히 정치적 오발탄이었다. 행여 「장외투쟁」이라는 또하나의 정치적 도박만은 삼가야 할 것이다. 전쟁터가 돼버린 국회를 바라보면서 주권자인 국민이 느끼는 혐오감과 절망감을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정경희 鄭璟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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