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
1999/01/06(수) 16:59
이기창 여론독자부장
1월의 문화인물로 민족화가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1916~56)이 선정된
이달에 뜻깊은 전시회가 기다리고 있다. 신화로 회자(膾炙)되는 이중섭이 아닌, 우리와 동시대를 살다가 떠난 인간 이중섭과 그의 예술혼을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이다.
「이중섭특별전」은 이중섭기념사업회(회장 구상) 주최, 갤러리현대 주관으로 21일~ 2월21일 한 달간 계속된다.
물론 「이달의 문화인물」 제도가 시행된 90년 7월이후 근대작가로는 그가 처음 선정됐다는 점도 이 전시회에 관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 보다는 이 전시회가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성으로 빛을 보게됐다는 데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다.
특별전에는 50여점이 나오는데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홍익대미술관 외에도 20여명의 소장자가 애지중지하던 작품을 기꺼이 내놓았다.
갤러리현대 박명자사장은 『고인의 작품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 재산」 이라는 소유욕을 버리고 많은 사람에게 감상의 기회를 마련해준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시회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화는 이처럼 많은 사람과 공유(共有)할 때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지닌다.
고인의 조카인 이영진(67·사업)씨가 소장하고 있는 「자화상」(종이에 연필, 32.3x49.2cm)은 타계 1년전인 55년 작품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이씨는 한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화상은 미쳤다는 소문을 들은 삼촌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친구인 소설가 최태응씨 앞에서 거울을 놓고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에 뒤로 쓸어넘긴 머리, 광대뼈가 두드러진 푹 패인 양볼 등 정치(精緻)하게 그려진 자화상은 고인이 처했던 한계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중섭은 사랑과 예술에서는 승리했지만 현실앞에서는 철저한 패배자였다.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반강제로 일본으로 보낸 일본인아내와 두 아들, 그들에게 평생 자신이 번돈으로 밥 한끼 먹이지 못했다는 죄의식, 그러면서도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 등이 그의 작품에는 응축돼 있다.
주최측은 뉴욕현대미술관 소장의 은지화 3점도 대여하려 했지만 전시일정이 촉박해 성사되지 못했다. 300여점이나 되는 은지화는 가난의 산물이다.
도화지 살 돈조차 없을 정도로 궁핍했던 이중섭은 담뱃갑의 은박지를 화폭으로 활용했다.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은지화 3점은 한국문화를 사랑하던 아더 맥가트가 대구 미문화원장으로 재직할때 구입해 기증한 것이다.
올해 여든 세살로 이중섭의 예술세계를 미국에 처음 소개한 맥가트는 영남대 등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 지난해 애리조나주로 돌아가 요양원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유작전은 72년과 86년 두 차례 열렸다. 갤러리현대는 그의 사후 처음 개최한 72년의 유작전도 개인소장자들의 대여작품으로 꾸몄다.
이 유작전을 계기로 이중섭은 민족화가로 본격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박명자사장은 당시 전시회입장료 등을 모아 「부부」라는 작품을 구입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에 이중섭작품이 「투계(鬪鷄)」한 점뿐인라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다. 종이에 유채인 「부부」는 41.5x29cm크기로 경쾌한 형태와 색채가 뛰어나다.
사랑으로 충만한 입맞춤을 통해 고민과 번뇌에서 해방된 부부새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에는 일본으로 떠나보낸 부인과의 못다한 사랑이 듬뿍 배어 있다.
생전에 더할 나위없이 가난했던 이중섭에게 주위의 격려와 우정은 예술을 지탱해주는 힘으로 작용했다. 사후에도 그의 예술을 민족의 자산으로 가꾸려고 노력해온 사람들에 힘입어 그는 우리 곁에 살아 있다.
문화는 이처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씨뿌려지고 가꿔져서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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