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뜬다. 우리들의 해가 뜬다. 어제를 지워 버리고 오늘의 해가 뜬다. 그래서 새해다. 모순과 반목의 과거를 버리고 화합과 사랑의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새 해는 마라도에서도, 정동진에서도, 금강산 해금강에서, 백두산 천지에서도 희망의 복주머니로 떠오른다. 다시 해가 뜬다. 동해의 푸르른 파도는 온 몸을 뒤척거리면서 어둠을 헤친다. 일렁이는 것은 파도이다. 파도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도 또 하나의 태양을 꺼내 놓는다. 그것이 새 해, 새 아침이다. 우리들의 해이다.평양을 간다. 분단의 앙금은 반세기동안 미지의 세계로 방기하게 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알기」이다. 가슴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통일의 길목이다. 숨결을 나누어야 한다. 평양의 순안공항에 내렸다. 가만히 서서 하늘을 응시했다. 푸르름뿐이다. 비색(翡色)의 하늘에 몇 조각의 구름이 몰려 다녔다. 바로 고려청자의 하늘이었다. 청자를 빚게 한 하늘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푸르름으로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아! 드디어, 평양에 왔구나」.
우리들을 초청한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소속 안내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무엇인가 말을 계속 꺼내고 싶었으나 입은 잘 열려지지 않았다. 특별 수속절차 때문인지, 아니면 공항의 규모가 작아서인지 이내 청사 밖으로 나왔다.
평양의 첫 인상은 「고요하다」였다. 고층건물들 사이로 시원하게 뚫린 거리가 너무나 넓어 보였다. 우리를 태운 벤츠승용차는 개선문을 지나고 천리마동상 모란봉공원을 거쳐 김일성광장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통일전망대」같은 화면에서 낯이 익었던 광장이었다. 행사때 열광하던 군중은 모두 어디 갔는지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텅빈 광장.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한산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자동차는 어쩌다 한 대씩 지나갔다. 행인도 드물었다. 도로는 노란 은행잎들의 차지가 되어 더욱 썰렁한 기운까지 느끼게 했다. 중심지인 김일성광장 앞의 양쪽 건물은 놀랍게도 미술관과 박물관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다소 마음이 차분해졌다. 문화예술기관을 중심에 위치시키는 곳, 무엇인가 대화가 통할 것같았다.
나는 한산한 도시라는 생각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안내원의 이야기는 달랐다. 『요즘은 김장전투시기여서 바쁩니다』 김장철이라는 설명이다. 세상에 김장 담그는 것도 전투란 말인가. 하기야 배추와 사람들을 잔뜩 싣고 달리는 트럭이 눈에 띄기도 했다. 안내원은 계속 설명을 한다. 김장도 배급을 한다고. 그런데 배급처는 어디 있는가. 식품가게가 의외로 드물게 보였다. 골목 입구마다 이른바 「슈퍼마켓」이 즐비한 사회체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우리의 구멍가게를 왜 「슈퍼」라고 부르는지 나는 이유를 모른다). 평양에서 볼 수 없는 것 중에는 서양식 단어가 있다. 콜라나 피자 혹은 레스토랑과 룸살롱이 있어야 할 자리가 「우리 식대로 살자」는 간판으로 대체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식대로 살자. 평양에서 외국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볼 수 없는 것이 제법 많다. 평양의 삼무(三無). 나는 속으로 생각해봤다. 그것은 광고판, 신호등, 나무이다. 간판은 상품광고판을 말한다. 상품선전의 어떠한 장치가 없다. 국산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회사간판 자리는 갖가지 구호가 차지하고 있다. 모두 다 비슷한 서체로 붉은 색 바탕에 하얀색 글씨로 도배를 해놓았다. 구호(口號)의 도시. 뒤에 서울에 와서 꿈을 꿀 때는 붉은 색 구호간판만 어른거렸다. 나는 평양여행 이후 몇 차례 꿈 속에서 다시 방북하는 기회를 가졌다. 왜 그렇게 비슷한 구호만 반복되고 있을까.
평양시내에는 신호등이 없다. 하지만 광복거리같은 데는 직선거리만 5㎞가 넘고 도로폭이 무려 100㎙이다. 양측에는 고층건물들로 즐비하다. 평양시는 하나의 신도시와 같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하루에도 수천 개의 폭탄을 쏟아 붓는데 남아 날 도시가 어디 있습니까』. 전쟁의 상처는 도시를 앗아갔단다. 평양시에는 6·25전쟁 이전의 건물로는 몇 채의 고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단 한 채의 민가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새 빌딩들을 세웠다고 했다. 그래서 도시가 가지런한 인상을 주었구나.
실향민들에게는 찾아갈 옛집이 없다. 어렸을 때 뛰놀던 마당과 골목, 다니던 학교, 그 모든 것은 앨범 속에서나 만날 수 밖에 없다. 실향민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일제기에 활동했던 평양출신 화가의 연고지 방문계획을 포기하면서 가졌던 회한이기도 했다. 김관호(金觀鎬)가 개인전을 개최했던 장소나 이중섭(李仲燮)이 다녔던 학교를 방문희망지 목록에서 삭제해야 했다.
거리에 신호등이 없는 대신 중심가에서는 교통안전원이 수신호를 보낸다. 10대의 예쁜 10대소녀들이 교통순경인 셈이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복무」를 했다. 거리의 행동예술가처럼 보였다. 귀엽고도 안쓰럽기도 했다. 교대시간을 물어 보았다. 1시간 간격으로 교대한다고 했다(겨울에는 30분 간격). 그네들을 바라보기가 조금은 민망했다. 절도있는 자세로 수고하는 것에 비해 거리가 한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네들은 어둠 속의 길 한 복판에서도 교통정리를 했다. 평양에는 교통체증이 없다. 따라서 주유소도, 택시도 잘 보이지 않는다. 평양에서는 매연이라는 단어가 필요없다.
또 보기 어려운 것으로 나무를 들 수 있다. 가로수나 공원같은 데는 나무관리가 잘 되어 있다. 그러나 외곽으로 눈을 돌리면 민둥산이다. 풀 한 포기 없는 산, 그것은 상상 밖의 풍경화였다. 북녘땅은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숲이 울창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상의 녹색은 하늘과 같지 않았다. 묘향산 가는 길에서도, 정방산 가는 길에서도 느낌은 비슷했다. 왜 산에 나무가 없는가.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북녘 산하는 검은 색이었다. 청자의 고향, 그 푸른색은 하늘과 명산에만 있었다. 야산의 벌거벗음, 나는 괜히 부끄러웠다. 지금이 제2의 「고난의 행군기간」이라 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초근목피(草根木皮)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어느 일요일 우리들은 평양시내를 빠져 나와 근교의 강서 고구려벽화고분을 보러 갔다. 비포장의 길가는 수천명의 행렬로 가득했다. 그들은 나무를 심으러 가는 길이라 했다. 봄에도 하지만 가을의 식목이 중요하다고 했다. 나무 심으러 가는 사람들. 비록 지금의 행색은 남루하더라도 그들에게는 푸르름의 내일이 있을 것이다.
나무를 심는 자에게는 미래가 있다. 이제 평화의 새해이다. 지금 축복의 새해가 동해에도 솟고 있다. 그것은 어제의 해가 아니다. 또 다시 해가 뜬다.
글 윤범모그림 박대성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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