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라는 미증유의 경제위기속에 정권교체 첫해를 맞은 98년, 정치권에는 시대상황을 반영하며 각자의 입장과 상대허점의 정곡을 찌르는, 어느해보다 풍성한 말의 성찬이 벌어졌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취임전 『한국경제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환자』라고 통탄한 뒤, 『재벌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이제 재벌의 시대는 끝났다』며 고강도 개혁을 예고했다. 이후 대기업들의 강한 저항이 예상되자 김대통령은 『저는 결코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언했고,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은 이를 받아 5대그룹 구조조정을 『야생마 길들이기』에 비유했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금감위원장이 금통령(金統領)인가』(박희태·朴熺太총무)라고 비판했고 재계 관계자는 『나에게 걸레(부실회사)는 남에게도 걸레인데, 장사되는 회사에 끼워서라도 팔리면 다행』이라고 자조했다. 또 현대자동차 노조는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희망퇴직에는 희망이 없다』며 한탄했다. 이와관련, 한나라당 박성범(朴成範)의원은 『도산없는 자본주의는 지옥없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말을 남겼으며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은 『교도소에 있는 동안 혈압이 좋았는데, IMF충격으로 혈압이 올라 교도소에 다시 가야할 판』이라고 웃기기도 했다.
○…새정부가 출범하면서 여야의 독설공방도 본격화했다. 첫 메뉴는 호남편중 인사시비. 한나라당은 『호남과식, 충청 소식, 나머지 기근』이라고 비난했고, 국민회의측은 『요직에 영남인사가 워낙 많아 목포·광주(MK) 인사로 바꾸는데 50년은 걸릴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이어 철새의원 파문이 일자 한나라당은 『의원을 장기판의 졸(卒)로 아느냐』며 발끈했고, 탈당리스트에 줄곧 거명된 김광원(金光元)의원은 『국민회의로 가려면 (부인이) 이혼부터 하자고 하더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태준(朴泰俊)자민련총재는 『정치는 힘이며, 힘은 곧 숫자』라며 끄떡도 안했다.
또 6·4지방선거 과정에서 당시 한나라당 조순(趙淳)총재는 『과속하는 초보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빨간신호등」인 한나라당에 힘을 실어달라』고 호소하자 자민련은 한나라당 의원들의 고스톱 사건을 빗대 『한나라당이냐, 광나라당이냐』고 비아냥댔다. 한편 4개월동안 서리딱지를 달고 있어야했던 김종필(金鍾泌)총리는 『서리(霜)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금슬금 녹아없어지는 것』이라며 착잡한 심경을 달래기도 했다.
○…8월말 「세풍(稅風)사건」을 신호탄으로 정치권 사정이 본격화하자, 설전의 수위는 극점으로 치달았다. 『현역의원을 구속수사하겠다는 것은 동물공화국적 발상』이라는 이회창(李會昌)총재의 말을 시작으로 한나라당은 『요새 교도소에서는 경상도말이 표준어』(박희태·朴熺太총무) 『서쪽의 서인이 동쪽의 동인을 마구 잡아들이는 무인사화(戊寅士禍)』(정형근·鄭亨根의원) 『여당무죄 야당유죄, 호남무죄 영남 유죄』(장광근·張光根부대변인)라고 맹비난했다. 이 와중에 정대철(鄭大哲)국민회의부총재가 전격구속되자 같은 당의 조홍규(趙洪奎)의원은 『여러분(검찰)의 잣대로 보면 나는 완전히 범죄덩어리다』며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또 한나라당 김영선(金映宣)의원이 「총풍(銃風)사건」과 관련, 『검찰은 서류 한장으로 북풍드라마를 쓰는 드라마센터』라고 비난하자, 박순용(朴舜用)서울지검장은 『이번 연속극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드라마가 끝나봐야 안다』고 맞받았다. 이어 『국회의 권위가 검사의 안주거리로 전락했다』는 한나라당의 비난에, 검찰은 『요즘 국회는 죄인의 도피처였던 삼한시대 소도(蘇塗)와 흡사하다』고 힐난하며 『안테나를 세워두면 모든 전파가 다 잡히는 것이지, 입맞에 맞는 주파수만 골라 수신할 수 없지 않느냐』고 표적사정 주장을 반박했다. 이 즈음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엔 『잠든 총풍 다시 보고, 꺼진 세풍 믿지 말자』는 말이 유행했다.
○…사정대상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6차례 임시국회가 소집된 것을 겨냥, 「방탄국회」 「피난국회」 「식물국회」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이 과정에서 자민련측은 이회창총재를 겨냥, 『걸면 걸리는 걸리버 의원들도 문제지만, 사정에 장외투쟁으로 나서는 사오정총재도 문제』라고 비난했다. 여야총재회담 성사과정에서 국민회의 한화갑(韓和甲)총무는 『이총재가 정치9단과 대국하려면 프로입문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고, 한나라당 박총무는 『청와대 가는 것이 화성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토로했다. 국민회의는 한나라당이 예산안 처리를 지연시키자, 『한나라당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당』이라고 비난했다. 의원들의 법안심사 행태와 관련, 재경위소속 한 의원은 『여론은 멀고 이익단체의 압력은 가깝다』고 탄식했다.
한나라당은 도청·감청문제가 불거지자, 『낮말은 검찰·경찰이 듣고 밤말은 안기부가 듣는다』라고 비꼬았고, 국민회의는 『도청장비와 시스템을 도입한 한나라당 도청정권이 영장감청을 시비할 수 있는가』라고 반박했다. 국회 교육위의 함종한(咸鍾漢)위원장은 『학교는 무너질 판, 교장은 죽을 판, 교감은 살얼음판, 장학사는 닦달판, 교사는 이판사판, 교실은 난장판, 학생은 개판, 학부형은 살판』이라는 「교육8판」을 소개, 세태를 꼬집기도 했다.
○…햇볕정책은 한나라당의 단골메뉴였다. 한나라당은 『경제적 실익을 받고 잠수정을 보내는 것은 북한식 빅딜, 은혜를 베풀고 무장간첩으로 돌려받는 것은 햇볕식 빅딜』이라며 『어설픈 햇볕정책에 중화상 환자가 속출한다』며 비판했다. 국민회의 임복진(林福鎭)의원은 『적개심은 전투시작과 함께 자동발생하는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한나라당 이세기(李世基)의원은 소떼 방북과 관련, 『소몰이 방북은 신판 조공행렬』이라고 비꼬았다.
내각제와 정책을 둘러싼 공동여당간의 잡음도 적지 않았다. 김총리는 『내각제가 잘 안될때는 몽니(심술궂고 고약한 성질)를 부리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정권교체 1주년을 맞아 『어울리지 않는 DJP 두사람의 공조는 정치적 불륜관계』라고 비꼬았다. 최장집(崔章集)교수는 사상논쟁에 휘말리자, 『초등학생이 박사학위를 심사하는 것』이라며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김총리는 『분홍빛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해 파문을 확산시켰다. 제2건국운동도 논쟁거리였다. 『관변·시민단체를 여권의 홍위병 조직으로 만들어 장기집권 음모를 획책하는 시도』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에 자민련도 젓가락을 올리자 김정길(金正吉)행정자치장관은 『제2건국운동은 동네북이고, 소위 왕따가 됐다』고 푸념했다.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경제청문회 증인출석논란이 벌어지자, 한나라당 민주계는 『이미 정치적 책임을 진 YS를 또다시 증언대에 세우는 부관참시(剖棺斬屍)식 청문회에는 응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자민련측은 『YS의 「씰데없는 소리」 한마디에 정치권이 그를 청문회에 세우지 못한다면 70~80%국민의 증언요구가 쓸데없는 소리라는 말인가』라고 되받아쳤다. /김병찬·김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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