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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비자금사건:3(문민정부 5년: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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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비자금사건:3(문민정부 5년:70)

입력
1998.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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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지시로 94년 봄부터 盧계좌 내사/총수 10여명 극비소환 돈준 사실 자술서 받아내/검찰,1년여뒤 盧씨조사직후 재벌수사 特命/盧씨도 취임하자마자 全씨 ‘5공비자금’ 조사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일까.

청와대와 검찰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퇴임때 비자금을 들고 나온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깜짝쇼」를 좋아했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비자금사건은 언제든지 터뜨릴 수 있는 「히든카드」였던 것이다. 정권안보에 충실했던 검찰은 그러나 손안에 들어왔던 먹이에 꼬리표를 달아 번번히 방생(放生)했다. 지시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추적해 잡아들일 수 있는 장치를 해 둔 것이다. 연희동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문민정부가 「어미」를 잡아먹고 자라는 「거미」는 아닐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노씨의 1차 소환일인 95년 11월1일 대검 중수부.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백기투항한 노씨는 검사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비자금을) 다 알면서 왜 그러는 거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비자금 사건의 시작은 1년6개월전인 94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정의 사령탑 대검 중수부는 몇 개월간 이상하리 만큼 조용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상문고비리사건과 농수산물시장 유통비리 사건등은 모두 서울지검의 몫이었다. 중수부는 2과에서「대전엑스포 조직위 금품수수사건」을 수사중인 것이 고작이었다. 정중동(靜中動)의 분위기가 3∼4개월째 계속됐다.

『10대 그룹 총수들이 한날 한시에 대검 중수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데 사실입니까』

94년 7월 대전엑스포 비리 수사결과 발표장. 한 기자가 증권가에 루머로 나돌던 대기업총수 조사설을 캐물었다.

브리핑을 맡았던 검찰간부의 천연덕스러운 대답. 『아, 그거요. 별거 아닙니다. 엑스포 연예인 지원단에 대한 자금지원내역을 묻기위해 모그룹 부회장과 전화통화를 한 사실이 와전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중수2과가 엑스포비리를 수사하는 동안 중수3과를 중심으로 대검중수부는 「특명수사」를 은밀히 진행하고 있었다. 이른바 6공비자금 내사.

검찰 고위관계자의 회고. 『역사의 우연이라고 할까요. 당시 중수부는 정부고위직을 지낸 모인사의 부정부패 혐의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는데 수표추적과정에서 노전대통령 비자금이 나왔어요. 그래서 극비리에 노씨에게 돈을 준 기업총수들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일부 언론에 이같은 사실이 새나갈 뻔 했어요.그래서 우리는 엉뚱한 걸로 포장을 한 거죠』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이 인사는 이현우(李賢雨)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었다. 검찰은 6공비자금의 심장부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6공비자금 내사의 실무책임자는 검찰내 특수수사통으로 불리던 김성호(金成浩·현 창원지검 차장검사) 중수3과장이었다. 김차장의 증언. 『93년 동화은행장사건이 끝난 뒤 재계에서 여러 소문이 돌았어요. 특히 이사건으로 김종인(金鍾仁) 전 청와대경제수석이 구속됐는데 잡아 넣고 나니 김씨는 그래도 비교적 청렴한 편이었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김태정(金泰政·현 검찰총장) 중수부장도 「김종인씨보다 이현우씨가 뇌물을 더 많이 받았고 문제가 있다는데 알아보라」고 했어요』 내로라하는 국내 유수의 재벌총수들 조사가 은밀하게 시작됐다. 보안을 위해 조사는 주로 주말을 이용, 시내 호텔에서 진행됐다. 은행감독원과 합동으로 계좌추적도 병행됐다. H그룹 J회장, D그룹 C회장 등 10여명의 재벌총수들은 노전대통령에게 돈을 주었다는 자술서를 썼다. 6공비자금의 「청지기」 이태진(李泰珍) 전 청와대경리과장도 조사를 받았다.

당시 조사가 이실장의 개인비리에서 출발해 검찰 독자 판단으로 시작됐다는 검찰의 설명은 맞는 것일까.

당시 연희동에서는 비자금 내역을 검찰이 조사하는 것을 알고 청와대와 여권에 강력히 항의했다. 검찰 고위관계자의 회고. 『연희동에서 아무리 청와대에 어필해도 먹혀들지 않았을 거예요. 청와대와 교감하에 우리가 움직이는데 문제 될 것이 뭐가 있었겠어요. 발주처가 청와대인걸… 다만 시운(時運)이 맞지 않아 묻어둔 것 뿐이죠』

검찰 조사는 외견상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지만 두더지 땅굴파기식 계좌추적은 비자금사건이 터질때까지 은밀히 계속됐고 5공비자금까지 촉수가 닿아있었다. 한 검찰간부의 이야기. 『몇몇 주요 재벌들의 비자금 제공사실은 파악이 된 상태였어요. 물론 전모가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진전이 있었죠. 한참을 파고 들어가니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보이는 계좌도 발견 됐지만 전부 가명이어서 실제 확인은 못한 상태였어요』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인과응보(因果應報)였다. 노전대통령은 취임후 은밀히 전씨가 청와대에서 들고 나간 5공비자금을 조사했다. 이때의 주공격수는 검찰이 아닌 안기부였다. 안기부 고위직을 지낸 모인사의 회고. 『정치인이 돈이 많다는 것은 정치세력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금만 있다면 유사시 정당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물론 노전대통령의 개인적인 궁금증도 있었을 거예요. 전씨가 넘긴 통치자금이 전체 중 얼마나 되는 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당시 안기부에서 파악한 전씨 비자금 규모는 1,000억원이 넘는 수준이었어요. 조사는 6공이 들어서자마자 시작됐어요』

6공시절 청와대 고위직에 있었던 모인사의 증언. 『전씨의 비자금 잔액 조사는 5공청산 차원에서 이뤄진 겁니다. 현정권에서도 YS의 정치자금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고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만약 안하고 있다면 국가관리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YS가 94년 노씨 비자금 내사를 지시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정치권의 한 인사는 당시 정가를 풍미하던 5·6공 신당설을 차단하기 위한 것 아니었겠느냐고 분석했다. 그러나 14대 대선당시 자금에 쪼들렸던 YS가 분풀이격으로 「도대체 노씨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는 설도 있다.

검찰이 6공비자금의 꼬리를 밟은 것은 정확히 YS 취임초인 93년 동화은행장 사건때였다. (본지 10월18일자 실록 청와대­동화은행장 사건(下)참조)

당시 대검 중수부 함승희(咸承熙) 검사는 이현우씨의 6공비자금계좌를 발견, 수뇌부에 수사건의를 했지만 묵살당했다. 물론 청와대의 지시에 따른 것.

이후에도 한양그룹 비자금사건, 원전비리사건, 상무대사건 등 6공의 정치자금과 얽힌 숱한 사건들이 청와대와 검찰의 묵인 아래 흘러 지나갔다.

청와대는 노씨 비자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증언. 『박계동 의원의 폭로 전 우리도 이런 저런 보고를 통해 5·6공의 비자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액수는 수백억원 정도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YS는 과거 정치자금 문제에 관한 한 떳떳할 수 없었던 탓인지 알고도 모른척 했어요. 우리도 대통령의 의중을 알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어요』

청와대가 검찰등을 통한 공식루트로만 비자금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홍인길(洪仁吉) 당시 청와대총무수석은 『93년 초 청와대 주거래은행 관계자에게 「전직 대통령이 쓰고 남은 돈이 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96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연희동측은 그러나 YS가 한동안 묵인하다 뒤늦게 이를 문제 삼은 것은 정치적 음모가 개입돼 있다고 주장했다. 6·27 지방선거 패배로 타격을 입은 YS가 15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국면전환용 카드로 사용했다는 것이 연희동의 시각이다. 김유후(金有厚) 변호사의 이야기. 『박계동씨 그사람, 그 자료를 어디서 받았답니까. 고등학교 후배에게서 얻었다고요? 나는 지금도 그말을 믿지 않습니다』

연희동측 핵심인사의 이야기.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지 2년만에 비자금 사건이 터졌어요. 청와대도 비자금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문제를 삼았을까요. 권력내부를 알고 나라를 운영해 본 사람이라면 박계동씨의 정보가 절대로 우연히 나올 수 없다는 것을 100% 확신할 겁니다』

다시 비자금 사건으로 긴박하게 돌아갔던 95년 11월 초 대검 중수부. 노전대통령을 조사한 뒤 수사검사들에게 「재벌들을 조사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검사들은 막막한 심정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단 불러 무조건 대라고 읍소작전을 펴야하나?」 그때 담당 검사별로 노란 봉투가 하나씩 전달됐다. 「90년 11월 이현우 실장에게 전화해 대통령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청와대 별관에서 노대통령을 만났습니다…」(J회장)

검사들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인(拇印)까지 찍힌 기업인들의 진술조서. 말로만 전해져 왔던 6공비자금 내사자료였다.

◎‘해프닝’ 된 서석재 발언 파동/“全·盧씨중 4,000억 계좌,이건 오프야”/무마용 검찰조사·장관 사퇴로 매듭

95년 8월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한정식집. 서석재(徐錫宰) 총무처 장관이 민자당 출입기자들과 회식을 하고 있었다. 폭탄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서장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야기 하나 할까. 이거 오프(Off the record·비보도 약속)요. 기업하는 친구가 찾아와 4,000억원대의 가명계좌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중 절반을 정부에 기증하면 자금출처를 조사받지 않고 실명전환할 수 있느냐고 물어왔어요. 몇군데 알아봤는데 편법전환할 수 없다고 해 그대로 전해주었어요』

(기자들) 『가명계좌 실소유주가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중 한사람입니까』

(서장관) 『두사람중 한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주위가 썰렁해졌다. 서장관은 재차 오프를 강조하며 『YS가 한 푼도 안받고 있는 것과 비교하기 위해 한 말이니 오해하지 말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애당초 가만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이틀뒤인 3일 서장관의 발언은 모신문 1면톱으로 보도됐다.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발언자인 서장관이 「YS의 그림자」로 불릴만큼 실세였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 청와대. 김영삼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짜증을 냈다. 『또 씰데 없는 소리를 했군. 우째 일이 이리 안풀리노』

서장관은 다음날 『시중에서 들은 잡다한 이야기를 재미삼아 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언론에서 공직자가 말을 바꾼다는 핀잔만 들어야 했다.

전·노씨 측은 강력하게 부인했다. 노씨는 7일 미 하와이 주립대 초청세미나에 참석차 출국하기 전 『이번같이 고약한 일은 세계에서 제일 잘 참는 나 같은 사람도 참을 수 없다』며 청와대와 민주계에 분통을 터뜨렸다.

4일 서장관은 YS의 지시로 마지못해 장관직을 사퇴했지만 사태는 수습되지 않았다. 청와대와 여권은 진상조사를 검찰에 맡기려 했지만 예상치 않던 벽에 부딪쳤다. 검찰이 『우리가 해명성 진상조사를 하는 기관이냐』며 버틴 것. 6공비자금을 내사했던 검찰로선 지뢰밭을 걷는 도박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사주체를 놓고 핑퐁게임이 계속됐으나 검찰이 청와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7일 저녁 팔레스호텔에서 검찰과 법무부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대검청사 서초동이전 축하모임. 안우만(安又萬) 장관과 김도언(金道彦) 검찰 총장이 별실에서 따로 만났다. 『당장 조사에 착수하시오. 이건 각하의 뜻입니다』. 법무장관의 지휘권 발동이었다. 지뢰밭을 잘 피해가라는 의미였을까. 주임검사는 6공비자금 내사를 했던 김성호 중수2과장. 김검사에게는 「서장관의 발언 진위만 수사하고 한발짝도 더 나가지 말라」는 주문이 전해졌다.

검찰은 9일 서장관을 조사하는 한편 서장관에게 발설한 대형음식점 「고향산천」 대표 김일창(金溢昌)씨 등 관련자들을 줄줄이 불렀다. 검찰은 조사하루만에 「슬롯머신 자금 1,000억원이 1년동안 11단계를 거쳐 액수가 4,000억원으로 과장됐다」고 발표했다. 또 사건발생 10일만인 12일 검찰은 1,000억원 계좌의 주인으로 알려진 이창수(李昌洙·당시 그린피아호텔 대표)씨와 같은 이름 중 시티은행에 있는 비실명 예금계좌 4개를 확인한 결과 잔고가 126원에 불과했다고 최종발표했다. 결국 4,000억원파동은 한 여름밤의 「납량소극(納凉笑劇)」으로 막을 내렸다.

서의원은 최근 인터뷰요청에 측근을 통해 『지금와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진실이 밝혀진 것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서의원의 측근인사 이야기. 『YS가 밝히길 원하지 않으니까 서의원이 그냥 참은 겁니다. 그래서 해프닝으로 끝나고 본인만 피해를 본거죠. 서의원은 김일창씨를 만나기 전에도 부산언론인 모임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결코 취중에 허튼 소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여러 채널에서 이야기를 들은 것이지요. 당시 5·6공의 신당창당 움직임이 있었는데 서의원이 총대를 메고 쐐기를 박은 겁니다. 다만 YS는 아직 히든카드를 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겠지요』<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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