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창리 지하시설 사찰문제를 놓고 미국과 북한간에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북한은 지하시설에 대한 사찰의 대가로 3억달러를 요구했으며, 미국은 제네바합의의 기본 정신을 어기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그렇지 않아도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합의 자체가 너무 유화적이었다는 공화당 의원들의 공격을 받아왔다. 지하시설의 성격이 핵관련 목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보가 나오고 클린턴 대통령이 스캔들로 곤경에 빠지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은 점차 강경기류를 띠어왔다. 4년전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지적 공격안을 입안했던 페리 전 국방장관을 한반도 문제 조정관으로 임명한 것 자체가 국무부 중심의 온건정책의 기류가 변하고 있다는 징후였다.그러나 미국이나 북한 모두 협상이 결렬되어 제네바 합의의 기본틀이 깨지는 경우 얼마나 큰 손실을 치러야 될 것인지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도 94년 상황과는 달리 클린턴 행정부의 입지가 대단히 좁다는 것, 그리고 벼랑끝 외교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저런 점들을 고려할 때 긴장국면은 올지 몰라도 파국은 우려하지 않아도 될 성 싶다.
설령 그러한 긴장국면이 온다해도 정경분리를 기조로 하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꾸준히 추진되어야 한다. 한미간에 대북정책의 기조에 다소 편차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입장을 바꾸어야 된다는 견해는 전술적으로나 명분적으로 진취적이지 못한 소극적 발상이다. 미북양측의 체면을 살리고 우리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타협안을 모색할 소지는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지하시설 문제를 정치적 거래가 아닌 인도적 지원의 문제로 성격을 바꾸어 버리거나, 지원의 주체도 KEDO방식을 따라 다자화해 버리는 방안들이 대안일 수 있다.
우리가 대북정책을 바꾸는 경우, 우왕좌왕했던 과거 정부의 혼란과 국론분열이 반복될 것이고, 이는 바로 북측이 원하는 바일 것이다. 남북 양측의 경제적 이득을 전제로 한 정경분리 원칙이나 인도주의는 유화정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우리가 철저한 안보자세로 북한의 책동을 물리치고 한미 군사동맹이 건재하는 한, 크게 흔들릴 필요가 없다. 근해에 중국이 미사일을 쏘아도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지속한 대만 사람들의 실리적이면서도 대국적인 자세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대북정책에 있어서 정경분리의 원칙이 지켜져야할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숙명처럼 끌어안고 있는 세겹의 분열구조를 어떻게 풀어가야할 것이냐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그동안 남북한의 대결은 바로 우리 사회가 동서로, 그리고 계층간에 분열하게 만든 원초적인 뿌리였다. 냉전 국제체제하에서 남북이 첨예하게 대결하자 정치권이 선택할 수 있는 이념의 폭은 대단히 좁았다. 아니 아예 없었다. 정치란 원래 대결과 타협의 소재가 있어야 되는데 이념과 정책이 그 소재 역할을 하지 못하자 지역주의가 그 자리를 메우고 들어섰다. 건전한 진보가 설 땅이 없고 좌익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는 모두 다 보수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호남이냐 영남이냐 하는 식으로 우리의 정치판과 사회가 갈라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진보세력은 지하화했고, 오히려 군부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정당성을 얻어 자본과 노동간의 계층간 갈등을 필요이상으로 심화시켰다. 결국 거시적으로 볼 때 정경분리에 기반한 우리의 대북정책은 우리 민족의 남북·동서·계층간 갈등구조를 해결하는 단초이다. 우리의 혼란한 시대속에서나마 화해의 정치 철학이 자리잡고, 그것이 현실 속에서 꾸준히 실천되지 않으면 우리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좌판밑 진흙탕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헤매는 북한 어린이를 보고 아파하는 마음만이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는 지역적 배타심과 추운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들의 고통도 녹여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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