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처럼 아무 것도 거둘 것 없는 이의 마음은 한없이 처연하다. IMF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심경이 바로 이렇다. 아니, 텅빈 들판앞에는 새 생명의 잉태를 약속하는 봄이 늘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불확실한 미래만 있을 뿐이다.IMF체제로 인한 우리 사회의 갈등과 고통의 의미는 「백수의 행로」와 「이대로족(族)」이라는 말속에 극단적으로 함축돼 있다.
『직장을 잃고 이른바 「백수」가 되면 집을 지킨다는 뜻에서 「주택관리사」라는 칭호를 가장 먼저 얻고 그 다음에는 가구를 쓸데없이 이리저리 옮긴다 해서 「주택디자이너」로 불리지요. 조금 뒤에는 거리로 나서는데 이때는 「도로공사」에 다닌다 하고 이어서 「지하철공사」로 출근하는 노숙자가 됩니다. 마지막에 이르는 길은 「팔자를 고치는 것」인데 다름 아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지요』. 지난 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IMF상황으로 비롯된 한국의 실업문제의 심각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이같이 실직자의 아픔을 토해냈다.
이런 아픔의 한편에서는 고금리와 금융종합과세유보 덕분에 소득이 늘어나는 「IMF귀족」이 등장,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키고 있다. 금융자산가 등 일부 부유층의 불로소득, 이에 더 나아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그들의 방종과 사치는 우리네 텅빈 가슴을 더욱 후벼파고 있다. 「이대로족」은 내심 IMF체제가 그저 고마울 따름인 이들을 빗대 태어난, 서글픈 신조어다.
정부의 장밋빛 예측과는 달리 새해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국내외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정부의 낙관적인 전망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우리의 또 다른 비극이다. 정부의 정책이 고통의 분담이 아니라 오히려 없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전담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장집(崔章集) 고려대 교수가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은 바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최교수는 이 글에서 『최근의 경제지표들은 경제위기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20대 80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민의 80%가 평균9%소득이 감소한 반면 상위 20%는 오히려 2.3% 증가했다. 구조조정의 비용도 하위 80%의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이들의 조세부담률이 두 자릿수로 증가한 반면 상위 20%는 단지 3.6%만 증가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이래 실업률은 7%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으로 소폭 감소했지만 재벌의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내년 상반기부터는 9%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대폭 증가할 전망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망의 고리를 끊을 방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같다. 암담한 상황일수록 모든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할 때가 아니다. 정부 기업 국민 모두 제 자리에 있으면서 본분에 충실했더라면 이처럼 참담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회광반조(廻光返照)자신을 돌아보자.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분수에서 벗어나 허영과 탐욕에 사로잡혀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찬 사회 역시 공멸이 자명하다. 남녀노소, 빈부의 차이를 떠나 저마다 본분을 되찾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무인(戊寅)년 한 해도 저물어간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어느 때 보다도 더욱 절실하고 그리운 요즘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고 이웃간에 주고받는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을 거둬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슴속에서 꺼져가는 희망에 다시 불을 지펴줄 불씨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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