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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여사를 기리며(社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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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여사를 기리며(社說)

입력
1998.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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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의 상징적 존재이며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던 이태영 여사의 장례식이 오늘(21일) 사회장으로 거행된다. 그는 여성에게 가혹했던 봉건적 사회질서를 개혁하는 시대적·선구자적 사명을 다했을 뿐 아니라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는데도 앞장섰다. 여성으로서 온갖 사회적 금기와 편견을 깨뜨리는데 용감하고 지혜로웠던 그는 자신의 성취를 통해 여성들을 고무하고 격려하면서 여성운동의 넓은 지평을 열었다.지난 17일 그가 세상을 떠난후 그를 기리는 각계각층의 조문행렬이 끊이지 않고, 특히 탁월한 지도자를 잃은 여성계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국가문제와 여성문제를 상의하거나 지도받고 싶을 때 항상 찾아갈 수 있었던 스승을 잃은 것이 슬프다. 한국의 큰 별이 영원한 빛을 발하기 위해 속세를 떠나셨다』는 윤후정 여성특별위원회장의 애도처럼 그는 여성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진정한 남녀평등시대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가족내 남녀차별을 없애기 위한 가족법 개정운동, 동성동본금혼 폐지운동 등 중요한 여성운동사에는 늘 그의 주도적 역할이 있었다.

두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의 유별난 교육열로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네자녀를 둔 주부의 몸으로 남편 정일형 박사의 격려에 힘입어 다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고, 고등고시에 도전하여 여성 최초로 합격한 것 부터가 그에게 선구자적 운명을 점지했던 것이었다. 그는 여성변호사 제1호라는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힘없는 여성들을 돕기 위해 56년 여성법률상담소(현 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하고, 법률 무료상담이라는 새분야를 개척했다. 그는 74년 민주회복 국민선언, 76년 3·1민주구국선언에도 참여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를 포함한 많은 인사들의 끈질긴 저항과 투쟁의 결과로 이제 암울하던 군사·독재정권 시대는 물러가고 여성인권도 크게 향상되었다. 설령 미진한 부분이 있더라도 우리 사회는 개혁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틀을 갖추게 되었다. 지적인 명석함과 시대를 앞서가는 사명의식, 탁월한 설득력과 친화력, 정의감과 용기를 갖춘 그는 한시대의 지도자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인권향상을 위한 그의 헌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유네스코 인권교육상·브레넌 인권상·법을 통한 세계평화상 등을 수상했고 국내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국제적 인정보다 국내에서의 평가가 인색했던 것은 그가 야당 정치인의 아내이고 평생을 독재와 맞서 싸웠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 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우리는 금세기의 가장 탁월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던 이태영박사를 보내며 그의 선구자적 삶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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