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는 청출어람과 관계한다. 한 작가가 앞선 역사에서 만들어져 자신의 시대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전」 을 뛰어 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 패러디의 성격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비록 정전을 비틀고, 비꼬고, 야유하는 방법을 쓰기는 하지만 그런 방법의 효과를 통해 정전의 꼭지 위로 올라서려는 작업이 패러디라는 것이다. 또한 패러디는 일종의 시비걸기이다. 정전의 자질과 품격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한편으로는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거의 습관적으로 경배하고 있는 수용자들의 고정된 태도에 벌침을 놓고자, 정전에 날선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일이 패러디이다. 그것을 통해 수용자에게 정전에 대한 관습적인 접근법을 따라가지 말라고, 그것을 뒤에서, 옆에서, 위에서 보기도 하고 뒤집어 보기도, 까서 보기도 하라고, 즉 새로운 독법을 패러디는 제시한다. 그럴 경우에 정전이 이전과 아주 달라 보일 것이라는, 정전에 대한 비판적 독해의 한 예시를 보여 주는 것이다.하지만 패러디는 언제나 아슬아슬한 운명에 놓여 있다. 정전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일이 정전의 예술적, 사상적 높이와 너비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할 경우 정전에의 비판이나 해체는 고사하고 한갖 객기에 그치기 십상이다. 절정고수 앞에 중원의 검객들이 부단히 도전하는 것처럼 예술사에도 정전에 도전하는 수많은 패러디가 출현했지만 성공의 확률이 그다지 높지 못했던 것도 결국 패러디의 방법과 역량이 정전의 그것보다 한 수 아래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대 들어 패러디가 더욱 빈번해지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근대적 과정에 대한 근본적 비판의식의 왕성함에 힘입어 근대 예술의 대표선수 격인 정전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벼려진 것이 그 까닭 중 하나이다. 이런 면은 사상적, 미학적 차원에서 촉발된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패러디 방법은 멀티미디어로 요약되는 테크놀러지의 가속적 발전에 의해 더 활성화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대한 문제가 가로 놓여 있다. 그래픽 기술의 발전이나 혹은 샘플링 기법 같은 음악정보의 데이터베이스화가 회화나 음악에서의 패러디를 더욱 손쉽게 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기술의 조작 그 이상이 아닐 가능성 또한 현저해지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패러디에 내포된 창의적이고 독특한 문제의식과 비판적 관점은 사라지고 그 공백의 자리에 화려한 기술의 합성만이 들어 앉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점은 우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벌써 현실의 일부가 된지 오래이다. 그러한 식의 패러디는 정전 혹은 문화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인 태도에 충격과 자극을 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가장 세속적이고 현실 영합적인 방법으로 전락을 촉진한다. 예술생산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현실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태도와 창의성이 더욱 미덕으로 여겨져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문학평론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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