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 9월 사할린 상공에서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참극은 아직도 그 비밀이 벗겨지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자동항법장치로 운항하는 여객기가 왜 그처럼 항로를 이탈했는가에 대해 대한항공이나 미국의 항공관제당국이나 시원스런 설명이 없다.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로 그 뒤에 벌어진 국제적인 움직임을 주목할 만하다.당시 유럽의 서방 각국에서는 미국의 첨단중거리 탄도미사일 배치계획에 반대하는 데모가 휩쓸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오차범위가 겨우 반경 50m인 중거리 탄도미사일 배치는 좌절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우연일진 모르지만 소련의 민간여객기 격추만행으로 유럽의 반전(反戰)데모는 순식간에 침묵하고, 반대로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의 미사일배치는 순조롭게 실현됐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 대한항공 여객기의 자동항법장치에 끼워 넣는 소프트웨어를 누군가 감쪽같이 바꿔친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런 의문이 민간여객기를 격추한 구 소련군사기구의 만행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냉전시대의 쓰라린 기억이다.
이제 「소련」은 역사속에 사라졌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시대에 살고 있다. 김훈 중위 의문사, 그리고 그 배경으로 지목되고 있는 소위 「판문점 내통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정치권,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한나라당의 태도는 아무리 호의적으로 본다해도 무책임하고 경망스럽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경비병력은 한국군이지만 최종적인 관할권은 유엔군사령부에 있다. 또 미국으로서는 중동과 함께 가장 민감한 2대 분쟁지역이다.
우리측 경비병이 유엔군당국의 승인이나 묵인없이 북측 경비병과 술을 마시고 선물을 주고 받는 「내통행위」는 상상할 수 없다. 적어도 그렇게 보는 것이 상식이다. 더구나 과거 수년동안 미군과 북한군이 유엔군 사령부의 허가아래 공동경비구역내 미군오락실에서 매주 술파티를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2월 김훈 중위 사망이후 중단됐다고 했다.
이 사실을 공개한 아시아재단 서울사무소장 케네스 퀴노세스는 미 국무부의 북한담당관으로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한국군 경비병이 북한군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정부당국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소위 「판문점 내통」이 단순한 개인적 범법행위는 아닌 것 같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기강해이 때문에 빚어진 망국적 행동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석연치 않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열달이나 지난 이제 와서 김훈중위 사망의 진상이 설혹 「타살」이라해도 과연 시원스럽게 밝혀질 지 두고 볼 일이다. 중요한 진상규명단서가 될 수도 있는 김중위의 수첩을 미측이 가져갔고, 애초에 미국측 수사관도 대충대충 조사하고 끝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린다.
결국 한나라당이 김훈 중위 의문사를 둘러싸고 천용택국방장관 해임을 요구한 것은 합당치 않다. 사건의 발단으로 지목되는 소위 「내통」자체가 대부분 한나라당 집권 당시인 지난해에 있었던 일이다.
설혹 김훈 중위 사망 진상을 축소발표했다 쳐도, 한나라당 자신도 관련이 있는 몸통은 묻어두고 그 말단만 문제삼는 이상한 행동이다. 그것을 정치쟁점화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경망스럽다. 미스터리의 진상은 조용히 캐야 한다.
국회복귀 두 달을 보낸 지금 또 다시 국방장관해임요구로 국회를 겉돌게 하는 일만은 삼가야할 것이다. 그런 경거망동은 오직 북측을 즐겁게 해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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