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18일로 개혁개방정책을 채택한 지 20돌을 맞는다. 78년 12월 18일 열린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3中全會)가 채택한 개혁개방노선은 20년간 중국은 물론 동북아와 세계 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중국 경제는 성장의 관성이 붙었고 정치적으로는 장쩌민(江澤民) 주석을 중심으로 한 제3세대 지도자군의 형성으로 안정을 구축했다. 그러나 인권문제, 빈부격차 등 성장의 그늘도 함께 드리워져 있다. 중국은 21세기를 앞두고 용틀임을 하고 있다. 개혁개방 20주년을 맞아 중국의 과거와 오늘, 미래를 짚어본다.◎어제/文革·毛式사회주의 추진 ‘빈곤의 점철’
올해 50세인 칭화(淸華)대 교수 K씨. 베이징(北京)대 78학번이다. 66년 고교를 졸업했지만 문화혁명으로 12년만에 대학에 들어갔다. K교수는 고단했던 지난 20년을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는 말로 압축했다.
『지겨운 굶주림, 한달버스비 3원(한국돈 450원)이 없어 무임승차 했다가 혼쭐난 일, 술 좋아하는 아버지에게 술 한 병 사 드리지 못한 일, 첫 아이를 출산한 아내가 영양실조에 걸렸던 일…』 마오쩌뚱(毛澤東)의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66∼76년)으로 빈곤이 극에 달했던 고달픈 시기였다. 농민들은 일할 의욕은 물론 이유조차 없었다. 전 인민의 77.2%가 화장실이 없는 집에 살았고, 28.2%만이 주방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화궈펑(華國鋒) 등 당 보수파들이 毛주석의 극좌경적 계급투쟁론, 교조주의를 신봉하며 득세했다. 이들은 덩샤오핑(鄧小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와 전면전을 벌였다.
78년 12월18일 비상소집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주자파(走資派) 鄧의 개혁개방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인민공사체제에서 벗어나 가구 생산책임제를 도입했다. 외부세계로 처음 눈을 돌린 중국은 외국 기술과 자본에 문호를 개방했다. 경제건설을 최우선시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물꼬가 트였다. 시내 곳곳에는 금지됐던 식료품 상점들이 등장, 잉여생산물을 매매했다. 개혁개방 20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오늘/무역고 세계 10위·연소득 1만弗 3,000만명
외국인을 상대로 한 카페 100여곳이 즐비한 베이징 산리둔(三里屯) 바(bar)거리. 한겨울인데도 초미니를 입은 아가씨들이 열심히 호객하고 있다. 이곳에서 3㎞ 가량 떨어진 5성급 쿨룬호텔 로비. 초저녁이면 외국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아가씨들로 초만원이다. 개혁개방 20년이 지난 오늘 중국에서 사회주의는 자취를 감춘 느낌이다. 자유로운 상거래로 시장은 활기가 넘치고 탈세가 당국의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당은 지난해 15차 공산당 대회에서 다양한 소유제를 인정, 곧 사회주의 대원칙인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헌법 조문에서 사라질 운명이다.
올해 1인당 국민소득은 800달러를 넘었다. 국민총생산(GNP)도 1조달러를 돌파, 세계 7위. 79∼97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무려 9.8%. 78년 206억달러로 세계 27위였던 무역액은 지난 해 3,251억달러를 기록, 10위로 뛰었다.
외환보유액은 1,400억달러를 넘어 일본에 이어 세계 2위. 연간소득 1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이 3,000만명에 달하고 3,000달러 이상의 중산층도 1억명에 육박했다. 인구가 13억으로 늘어난 현재 절대빈곤층은 5,000만명으로 줄었다.
확고한 정치 안정도 이루었다. 지난해 덩샤오핑의 사망과 홍콩반환, 15차 공산당 대회를 거쳐 올해 9기 전인대(全人大)를 통해 제3세대 지도층 라인업도 끝냈다. 핵잠수함을 9척이나 갖고 있는 군사강국을 유지하고 있으며 올해 빌 클린턴 미대통령의 방중으로 미국과 전략적 우호관계를 두텁게 했다.
◎내일/금융 등 3대개혁… 21세기 슈퍼대국 야심
중국은 2000년까지 연평균 국내총생산(GDP)성장률을 8%로 유지, 1인당 국민소득을 80년의 4배 수준인 1,000달러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또 2010년까지 2,000달러로 끌어 올리고 21세기 중반까지는 중진국 수준(4,000달러)에 도달한다는 목표다.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국유기업과 정부개혁, 금융개혁 등 3대 개혁과제를 설정하고 이를 3년 내 완성하겠다며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21세기 중국은 거대한 15억 시장과 엄청난 노동 잠재력, 기술 수준을 무기로 한 주요 공산품의 「세계적 생산기지」가 될게 확실하다. 그러나 요원한 정치민주화와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치안불안, 지역 및 계층간 소득격차, 대만·티베트문제, 수천만의 실업자군, 취약한 금융구조 등 아킬레스건도 만만치 않다. 특히 고도 성장이 가져 온 빈부격차 문제는 앞으로 현대 중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다. 인권문제로 인한 서방과의 갈등도 중국의 세계화에 걸림돌로 남아있다.
21세기 중국은 세계사의 전면에 「슈퍼 파워」로 등장할 것인가? 정치·경제적으로 소강 상태는 있을 지라도 21세기 중국의 파워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중국의 외교력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잠재력을 등에 업고 힘을 발휘할 것이다.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팍스 아메리카나)에서 「팍스 시노아메리카나」(미중 양극체제)시대로 가겠다는 야심마저 풍기고 있다.<베이징=송대수 특파원>베이징=송대수>
◎뜨고 진 별들/胡耀邦·趙紫陽 권력투쟁 밀려/鄧 추종 ‘江李朱 라인’ 실세부상
개혁개방 20년 역사는 보혁(保革)간 권력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별들이 명멸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중국현대사의 물줄기를 혁명에서 경제건설로 바꿔놓았다.
개혁개방 초기 鄧의 반대쪽에는 毛의 노선을 추종하던 화궈펑(華國鋒)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가 있었다. 78년 11기 3중전회에서 보수파는 개혁파에 밀려 퇴장했다. 실권을 잡은 鄧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오른팔인 후야오방(胡耀邦)을 당총서기, 총리직에는 왼팔인 자오즈양(趙紫陽)을 임명, 개혁개방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반문혁(反文革) 세력도 세월이 가면서 개혁파와 보수파로 분열되며 적극적 개혁파였던 胡는 학생운동에, 趙는 천안문사태를 계기로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
잠정적으로 군세력인 양상쿤(楊尙昆) 양바이빙(楊白氷)형제의 부상이 있었다가 3번째 鄧의 후계자로 선택된 것이 장쩌민 현국가주석. 鄧의 후견 아래 10여년동안 중국을 이끌던 장쩌민리펑(李鵬)차오스(喬石)의 3두마차는 98년 전인대를 계기로 喬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주룽지 총리가 전면에 등장했다. 제4세대 지도자로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부주석이 21세기 중국호의 선장으로 본격 부상하고 있다.<베이징=송대수 특파원>베이징=송대수>
◎20년간 신조어/電腦(컴퓨터) 등 7,000여개 탄생
중국 국가언어문자 사업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78년 이래 새로운 어휘는 7,000여개가 생겨났다.
컴퓨터는 처음 지쏸지(計算機)로 불렸으나 지금은 뎬나오(電腦)로 변했다. 인터넷이 많이 보급되면서 롄왕(聯罔·인터넷), 왕민(罔民·인터넷 가입자), 왕충(罔蟲·인터넷 중독자) 등 단어가 탄생했다.
주식시장이 개설되면서는 다반(大盤·주식시장 흐름)과 오름세 및 내림세 증시를 각각 나타내는 뉴스(牛市), 슝스(熊市)도 생겼다.
휴대전화는 처음에는 암흑가의 보스를 의미하는 다거다(大哥大)였으나 대중화하면서 소우지(手機)로 바뀌었다. 남자에 대한 호칭도 통즈(同志)에서 시엔성(先生)으로 변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