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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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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17)

입력
1998.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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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극서 뮤지컬까지 눈부신 성장/음악·무용/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계기/풍성한 ‘공연잔치’ 시대 개막/국악도 78년 사물놀이 등장후/양적성장·상품성 높여가건국이후 반세기동안 양악무대에서는 국내보다 해외 유명연주자의 내한공연이 주목받은 편이다. 50년대의 혼란과 궁핍에도 테너 아리고 폴라, 리처드 터커등의 공연은 표를 구하느라 아우성이었다.

문공부 주최 62년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는 처음으로 외국아티스트를 대거 초청하고 국내 최고의 음악가까지 총집합, 공연계의 「천지개벽」으로 받아들여졌다. 75년 광복30주년 음악제도 굉장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음악제가 생겼고 이후 연극제 무용제가 등장, 페스티벌형식의 공연이 자리잡게 됐다.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이 개관하면서 공연사는 전환점을 맞았다. 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음악제는 사상 최대의 예술제로 치러졌다. 4월21일부터 7월8일까지 157회 공연에 27만명이 관람했다. 외국에서 초청된 16개국 850여명 외에 국내 20개 단체와 예술인 2,900여명이 참가, 출연자 연인원이 1만명을 넘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 요란한 잔치의 성공을 박정희정권의 마지막 기념품으로 예견했다.

예술의전당은 88년 개관 이후 국내 공연의 90% 이상을 소화하고 있다. 특히 한국오페라 반세기를 맞은 올해 11월 한 달동안 열린 오페라 페스티벌은 유례 없는 흥행 폭발로 오페라사를 다시 쓰게 했다.

국악의 양적 팽창도 놀랍다. 60년 이전까지 국악 공연은 국극단이나 창극단의 지방순회를 빼면 연간 10여회가 안됐지만 지금은 1,000회를 웃돈다. 60년대 이전은 국극 전성시대로 「해님달님」같은 공전의 히트작도 나왔다. 70년대 이후 최고 화제작은 78년 등장한 사물놀이. 이후 수많은 국내외 공연으로 한국전통음악의 대명사처럼 됐다. 국악은 여전히 양악에 비해 상대적 열세이지만 80년대 이후 기획공연의 증가, 90년대 이후 스타부각전략으로 차츰 상품성을 높여가는 추세다.

무용은 공연예술 여러 장르 중 가장 취약한 영역. 최장기 흥행작으로는 73년부터 26년째 공연중인 육완순 안무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오미환 기자>

◎연극·뮤지컬/50년대 연극·여성국극 인기/‘뇌우’‘해님달님’ 등 대히트/75년 ‘에쿠우스’로 소극장운동/80년대 후반 무대 대형화

일제강점기 서민의 설움을 달랜 것이 신파무대였다면 건국후 관객의 발길이 집중된 것은 신협의 연극과 여성국극이었다. 50년 봄 국립극장 전속극단으로 출범한 신협은 두번째 공연 「뇌우」에서 15일간 7만5,000명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인구가 40여만명이었으니 그 6분의 1이다. 51∼52년 신협의 피난연극도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48년 여성국악동호회로 출발한 여성국극은 「해님달님」(49년)같은 히트작을 냈으나 5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쇠락했다.

50년대 중반부터 연극과 여성국극은 영화에 밀렸다. 60년대 대학동문을 중심으로 한 동인극단이 본격 태동함으로써 소극장시대의 밑바탕이 되었다. 후에 「따라지향연」「대머리여가수」(자유), 「환타스틱스」(가교),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민중)등이 성공한 레퍼토리로 남는다.

소극장운동의 새 장을 연 것은 실험극장의 「에쿠우스」(75년). 서울 운니동에 150석의 소극장을 개관하면서 막을 연 「에쿠우스」는 두 달만에 1만명을 넘기고 연장을 계속했다.

예매제가 처음 등장했고 표를 달라는 고위층의 외압이 심했다. 주연 강태기는 링거를 맞으면서 무대에 섰다. 30일 50일 공연이 더러 있었지만 대체로 1주일로 끝나던 연극계에 명실상부한 소극장 장기공연체제가 정착됐다.

77년 추송웅의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은 모노드라마 붐의 효시. 3·1로창고극장은 개막 3시간 전부터 장사진을 이루었고 추송웅은 지방공연까지 4개월동안 혼자 6만여명을 동원했다. 80년대엔 윤석화가 대표적인 모노드라마 흥행사였다.

반면 78년 현대극장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단 7회동안 2만4,700명을 동원함으로써 단발·대형·대중연극의 선구자가 됐다.

83년 실험극장 「신의 아그네스」는 20일 기간을 1년으로 연장하며 6만5,000명, 연우무대 「칠수와 만수」(86년)는 1년간 5만명을 기록한 신화들이다. 대학로극장 「불 좀 꺼주세요」는 92년부터 만 3년간 20만명이 관람, 중단없는 단일공연으로 최장기 최다관객의 기록을 세웠다.

80년대 들어 몇년 간격으로 재공연하는 레퍼토리화가 자리잡고, 80년대 후반 무대가 대형화하면서 관객규모는 급팽창했다.

현대극장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80년부터 75만명, 「아가씨와 건달들」은 83년부터 여러 극단이 동원한 관객을 합치면 200만명이 든 것으로 추산된다. 롯데예술극장 「웨스트사이드스토리」(89년)는 8개월간 12만명.

에이콤의 「아가씨와 건달들」(94년)은 뮤지컬의 수익성을 증명했다.19일만에 4만2,000명이 들면서 7억원을 들여 11억원의 매출(수익률 57%)을 올린 경이적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명성황후」는 95년부터 간헐적으로 앙코르를 가지면서 서울 뉴욕 로스앤젤레스에서 26만명을 동원했다.<김희원 기자>

◎한국을 빛낸 예술인들/정명훈·백건우·정경화 등 세계음악무대서 스타로 부상

한국 공연분야의 세계적 스타는 주로 음악에서 나왔다. 지휘자 정명훈, 피아노의 백건우, 바이올린의 정경화 강동석 김영욱 강동석 장영주, 첼로의 장한나, 소프라노 홍혜경 신영옥 조수미등. 이들은 세계무대를 누비며 한국인의 탁월한 예술성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정명훈 백건우 홍혜경 조수미는 세계 음반시장을 장악한 도이체 그라모폰, RCA, 에라토 등의 레이블로 음반을 내며 세계 음악계의 핵심부에 들어가 있다.

국제음악콩쿠르 입상의 효시는 65년 미국 레벤트리트와 메리워드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노의 한동일, 바이올린의 김영욱이다. 90년대 들어서는 바리톤 최현수,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각각 1위, 2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올린 것을 비롯해 각종 콩쿠르에서 여러 신예들의 낭보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성악분야의 약진은 대단해 성악 본고장인 이탈리아의 주요 콩쿠르를 한국인이 휩쓸다시피 하고 있다.

무용쪽에서는 발레의 약진이 눈부시다.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프리마발레리나 강수진이 대표적이다.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용걸 김지영은 지난해와 올해 세계적 콩쿠르를 2개씩 차지, 국제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오미환 기자>

◎무대기술 어디까지/50년대 ‘소금독 디머’ 조명/최근엔 ‘디지털 시스템’ 발전/세트제작비 1억 넘기도

무대기술은 마술적이다. 배우가 선 세트는 튼튼하면서 운용이 쉬워야 한다. 의상은 아름다우면서 간단히 입고 벗어야 한다. 세트와 의상은 조명과 어우러져야 하고 조명은 수천가지 분위기를 내야 한다. 음악과 음향은 극을 북돋우되 제압해선 안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경제적이어야 한다.

전쟁통에 「햄릿」 「오델로」같은 번역극을 공연할 때는 군용 알루미늄캔을 가위로 잘라 왕관 목걸이등을 만들었다. 무던히 손을 베었지만 조명이 비치면 그럴듯 했다. 조명 밝기를 조절하는 디머(Dimmer)로는 소위 「소금독 디머」가 쓰였다. 각목에 몇 개의 납을 박고 구리전선을 연결한 뒤 소금물이 담긴 드럼통에 담그면 소금물이 전류를 전달하면서 조명에 불이 들어온다. 소금물에 깊이 담글수록 밝아지고 꺼낼수록 어두워진다. 두 개의 전선을 소금물 속에서 가까이 대면 밝아지고 멀리하면 어두워진다. 전류가 고르지 못해 불이 흔들리는 게 흠이었지만 소금독 디머는 대학극에선 80년대 초까지도 쓰였다.

무대예술은 70년대 들어 많은 발전을 했다. 기성극단은 기계식 디머, 자동변전 디머, 자석식 디머, 실리콘을 이용한 현대식 디머를 쓰기 시작했다. 또 수백번의 조명·음향 큐가 컴퓨터에 입력되는 컴퓨터시대가 열렸다.

장치부분은 80∼90년대 들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형 연극 뮤지컬이 많아지고 기술수준이 높아지면서 열차가 등장하고 해적선이 떠가고 자동차가 절벽에서 떨어지는등 스펙터클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세트제작비가 연극제작비 수준인 1억원을 호가하는 경우도 있다. 뮤지컬 「겨울나그네」의 무대세트는 5톤 트럭으로 5대 분량이나 됐다. 경제호황과 80년대 후반부터 외국서 유학한 무대미술가들이 귀국함에 따라 이런 발전이 가능했다. 더불어 문예진흥원이 설립한 벽제제작소등 무대제작소가 수 곳 생겨나고 무대예술가협회가 운영하는 무대예술아카데미가 100명이 넘는 수료자를 배출하는등 저변도 확대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용인대, 상명대등 정규대학에 무대미술학과가 개설된 것은 90년대 중반이후다.

최근에는 색깔 밝기 모양 방향까지 조절이 가능한 디지털방식의 조명시스템, 순간적으로 불에 타는 천등 특수재료, 전자음을 이용한 음향효과, 영상기술의 결합등 기술적 수준이 두루 높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젖은 신문지와 풀을 섞은 종이죽이 소품제작에 쓰인다. 종이죽으로 못 만드는 게 없다. 그래서 무대예술가들은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컴퓨터는 0.1초단위를 셀 줄 알아도 분위기에 따라 완속(緩速)이 달라지는 공연의 흐름은 오퍼레이터만이 잡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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