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 제고도 좋지만 기업가 정신마저 꺾는다면 구조조정 부작용 우려1998년 12월7일은 지난30년동안 한국경제의 지주역할을 한 재벌의 해체선언일이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이후 점령군인 맥아더 사령부가 패전국 일본의 「자이바츠」(財閥)를 전쟁의 원흉으로 몰아넣으려 했듯이, 우리 정부도 IMF 경제위기의 원초적인 진원지를 대기업그룹에서 찾았다.
재벌이 과도한 차입금으로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은 막무가내식의 사업확장을 하다보니 경제위기를 자초했다는 진단이다. 앞으로는 선단식경영과 계열사간 내부지원을 통한 외형성장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각 계열기업들은 독립된 경영체제를 갖추면서 투명한 협력구조만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5대그룹 계열사를 현재 264개에서 130여개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대기업그룹에 대한 공격이 있었으나, 그 때마다 무위로 끝났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6·25이후 가장 심각한 국란이라는 IMF사태가 큰 몫을 하였다. 은행이 망하면 국가가 무너진다고 인식했으나 은행도산이 줄줄이 있었듯이, 자금부족에 허덕이고 있는 대기업그룹은 더 버티다가는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마도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맥아더 못지않은 김대통령의 카리스마가 더 크게 작용한 것같다. 국민의 힘이 실린 대통령의 위압을 느낀 듯하다.
재벌해체작업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기업그룹간의 상호지급보증제도를 없애고, 부채비율을 200%이내로 줄인다는 것은 재벌 고사(枯死)정책인 것이다. 현재 수준으로 보아선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부채비율 줄이기에 필요한 60조가 넘는 자금을 자본시장에서 마련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한국경제는 「아시아의 기적」이라는 찬양을 머지않은 과거에 세계 각국으로부터 받았었다. 고도경제성장력과 국제경쟁력이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제조능력의 원동력이 대기업그룹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된다. 대기업그룹의 장점은 국제경쟁력 있는 대규모 투자, 사업포트폴리오에 의한 위험분산, 자금조달비용의 저하, 다양한 경험을 갖춘 인재양성, 모험심있는 기업가 정신 등의 시너지 효과였다. 「5대그룹 구조조정 추진 합의문」에 내포되어 있는 기조도 이러한 대기업의 장점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다. 핵심역량 배양을 위한 계열기업조정으로 국제경쟁력을 키우고, 재무구조개선으로 자금조달비용을 낮추고, 안정성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으로 인해 대기업 경영자의 기(氣)를 죽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경제가 있기 까지에는 뭐니뭐니해도 지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이 있었다. 기업가정신 즉, 위험을 무릅쓰는 사업의욕을 붙잡아 두는 추가적인 방안이 강구되지 않으면 구조조정의 실(實) 못지않게 허(虛)도 클 수가 있다. 이번 합의문은 대외적으론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 외국투자가의 입장에서 본 한국투자여건의 애로부분인 경영투명성 결여와 상호지급보증에 따른 재무리스크가 해결되는 획기적 조치이기 때문이다. 또 세계적 생산과잉 산업으로 알려진 화학 반도체 철강분야에서 한국이 자진해 중복투자를 조정한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과감하고 무모하기도 한, 그러나 국제경쟁력을 갖추어가고 있는 한국기업을 IMF를 통해 길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파장이 심각할 것이다. 대량실업, 협력업체도산, 주식시장의 매물압박과 이에 따른 연쇄적인 경기후퇴효과라는 후유증이 나타날 것이다. 최소한 5만∼6만명의 새로운 실업자가 생길 것이고, 연관효과가 높은 중화학공업에 관련된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을 것이다. 막 뜨기 시작한 주식시장은 증자러시로 도리어 주가가 낮아져 증자를 통한 재무구조개선을 어렵게 만들지도 모른다. 후유증이 증대되면 재벌개혁이 약화할 수도 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한 재벌개혁이 실행없는 합의문만으로 끝나지 않도록 이러한 후유증을 최소화할 방안이 철저히 강구되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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