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는 과연 재벌개혁을 성공할 수 있을까.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5대그룹 총수가 서명한 「12·7 정부재계 합의」는 당초 예상을 크게 뛰어 넘는 수준의 재벌개혁조치다. 합의내용이 제대로 이행될 경우 현재의 재벌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는 사실상의 재벌해체를 의미한다.재벌이 정말 개혁될까. 재벌의 속성과 정치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반신반의한다. 『두고 봐야 한다』는 게 주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벌개혁이 추진됐지만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 경험 때문이다.
「12·7 합의」는 과거의 재벌개혁 정책과 질적으로 다르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라는 경제상황, 김대통령의 확고한 재벌개혁관, 투명한 재벌개혁추진 등이 과거와 판이하다. 합의사항도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다. 과거 정권은 재벌정책을 밀실에서 물건 흥정하듯 입안했지만 「국민의 정부」는 사실상 공개적으로 추진했다. 5대재벌이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고서는 배겨내질 못하고, 합의사항을 이행할 경우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으로 믿어지는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다. 문어발 경영과 총수의 황제식 경영(전횡)은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개혁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역대정권이 모두 재벌개혁에 실패했을 정도로 재벌의 대항력은 막강하다. 조직적인 저항이 예상된다. 재벌개혁의 주체(정치권력)와 객체(경제권력)의 속성도 아직 변하지 않았다. 집권세력은 정권 재창출(정권유지)이, 재벌총수들은 비지니스 영토확장(사세확장)이 지상 최고의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호협력(정경유착)할 개연성은 항상 있다. 정경유착을 막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재벌개혁 성공의 관건은 바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자의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안전장치를 얼마나 잘 만들어 놓느냐에 달려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재정경제부장관 금융감독위원장 등 주무부처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 주거래은행장, 해당그룹총수가 아무리 바뀌어도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관련 그룹이나 은행이 합의사항을 이행할 경우 약속된 인센티브가 곧바로 주어지고, 반대로 이행하지 하지 않을 경우 제재조치가 즉시 취해지도록 하는 자동격발장치(Automatic Trigger System)를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벌개혁이 또다시 유야무야될 수 있다.
내년의 경제상황과 정치여건은 재벌개혁에 대해 우려감을 더해 준다. 경기가 크게 회복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만약 경기가 살아나 기업의 수익성이 높아질 경우 재벌들은 『돈버는 계열사를 정리할 필요가 뭐 있느냐』고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려 할 것이다. 또 불황이 심화하면 재벌에 경제난의 해결을 맡기려는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비록 차선책이고 언발에 오줌누기식이지만….
집권여당은 내년초부터 2000년 총선 준비에 본격 착수할 것이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총선에서 승리하려 할 것이다. 재벌은 이러한 「정치적 틈새」를 파고 들게 분명하다. 때로는 집권여당을 지원하고, 때로는 흔들면서 개혁의지를 희석시키려 할지 모른다. 재벌의 로비력은 정평이 나있다. 정부의 1년예산을 능가하는 매출액, 수십만명에 달하는 임직원, 수많은 협력업체 등이 로비력의 원천이다. 여론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제연구소와 언론기관 대학교 등도 직접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재벌이다.
정부와 여당이 재벌을 꼭 개혁하려거든 「12·7 합의」를 반드시 이행토록 하는 자동격발장치를 꼭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재벌개혁에 대한 신뢰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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