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지금 20년 전 척박한 대륙에 개혁과 개방의 불씨를 지폈던 농촌개혁 진원지 안후이(安徽)성 펑양(鳳陽)현 샤오강(小崗)촌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18일은 개혁파가 보수개혁파와의 전면전에서 승리한 기점인 11기 3중전회 20주년과 개혁 개방 20주년.
78년 당시 중국의 농촌은 대약진운동 실패와 10년간의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피폐화했고 2억 5,000만 명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화궈펑(華國鋒)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극좌경적 계급투쟁론, 연속 혁명론, 교조주의에 입각해 득세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덩샤오핑(鄧小平)과 개혁파 기수 후야오방(胡耀邦)등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천안문사건, 진리표준논쟁 등을 통해 보수파와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륙의 궁핍한 농촌 샤오강촌 18호가 가난의 상징인 인민공사제를 폐지하고 농가생산책임제를 실시하자는 엄숙한 결의를 맺었다. 죽음을 무릅쓴 것이었다. 당시 이들이 맺은 서약서(GB4563호)는 중국혁명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같은 농촌개혁의 발상은 당시 안후이성 서기 완리(萬里)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당중앙은 毛주석의 방침에 따라 인민공사제도를 지켜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반대했다.
이런 와중에도 샤오강촌의 농업개혁은 단행됐고 개혁파의 지지로 11기 3중전회를 통해 결실을 맺어 중국 개혁·개방정책의 문호를 여는 계기가 됐다.
샤오강촌이 농민의 노동의욕을 고취시키는 농가생산책임제를 실시한 1년 후 이 지역 생산량은 400%가 증산됐고 이 물결은 20년이 지난 지금 풍요롭게 변한 농촌의 뿌리가 됐다.
중국은 농촌개혁을 통해 식량생산량 2억톤을 증산, 12억 인구의 식량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돼 안정된 단계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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