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때의 일본 외무장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는 전후 1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그러나 그가 없었으면 오늘의 일본이 있을 수 없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일본인은 많지 않다. 개전 당시에도 같은 자리에 있었던 그는 무모한 전쟁을 막기위해 끝까지 미국과의 협상론을 굽히지 않았다. 패망 당시에는 어전회의에서 「1억 총 옥쇄론」을 주장하는 군부의 강압에 맞서 무조건 항복을 관철한 일화로 유명하다.■그는 100% 한국인의 피를 받은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400년 전인 1598년 정유재란 때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납치당해 일본에 끌려간 남원 도공이다. 그는 네살 때까지 박무덕(朴戊德)이란 이름으로 불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성을 갖게 되었다. 조선 도공을 보호하던 사쓰마(薩摩)번이 가고시마(鹿兒島)현으로 바뀌고, 정한론의 영향으로 조선인 멸시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의 아버지(朴壽勝)는 개명을 단행했다.
■그는 조선 도공들의 마을인 나에시로가와(苗代川)의 별이었다. 전범으로 기소됐을 때는 그의 생가에 돌이 날아들기도 했으나, 일본을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구출했다는 평가로 지난 봄 기념관을 만들었다. 한국피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 명문가 규수와의 첫사랑에 실패한 그는 한평생 한국계라는 멍에를 안고 살았다. 까다롭기로 유명했던 그가 외무성 국장 시절 동족 후배를 몰래 불러 술을 사준 일은 그의 출신과 관련한 일화다.
■사쓰마 도자기 400주년 기념행사가 한창인 가고시마에서 최근 한일 총리회담이 열렸다. 김종필 총리는 회담후 오부치 일본총리로부터 도고 기념관 참관 제의를 받고 『도고는 전범이어서 곤란하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개전에 동의한 그의 책임과 군국일본의 전쟁책임을 희석시키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흔쾌히 참관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그의 공로를 강조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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