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 야단법석」. 최근 다시 재연되고 있는 불교 조계종의 분규사태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 말들을 떠올리고 있다. 어느 쪽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속인과는 뭔가 달라야 할 스님네들이 폭력을 주고 받는 모습은 고단한 IMF시대를 살아가는 모든이의 마음을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오죽하면 김종서 전 교육개혁위원장, 박광서 서강대교수, 시인 고은 류시화씨 등 학계와 문화예술계 불자들이 지난달 26일 「불교 바로서기를 염원하는 지성인 461인 선언」을 발표했을까. 불자들은 요즘 이렇게 말한다. 『누가 절에 스님보러 가나요. 부처님보러 가지』.
30일 조계사 승려대회는 우려했던 결과를 낳았다. 20여일째 총무원을 점거하고 있는 이른바 「정화개혁회의」측과 「종헌종법 수호를 위한 전국승려대회」주최측 스님들간의 폭력사태는 무협지의 비무(比武·무술겨루기) 장면을 연상시켰다.
불교에서 나온 「이판사판(理判事判)」 「야단법석(野檀法席)」은 원래 거룩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판은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이고 사판은 절의 살림을 맡는 스님을 일컬었다. 야단법석은 많은 사람을 위해 야외에 차린 설법장을 말한다. 그런 말들이 지금은 아주 부정적으로 쓰인다. 이판사판은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형국이며 야단법석은 여럿이 떠들거나 싸움박질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야단(惹端)법석과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절집에서는 이처럼 좋은 말들이 조선시대에 부정적 의미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조선은 억불숭유의 일환으로 스님에게 최대의 불이익을 주었다. 당연히 이판이 되었건 사판이 되었건 출가는 인생의 마지막 길로 인식된 것이다. 신분제도상 스님은 노비보다도 천한 마지막 계층이었기 때문에 이판사판이 그런 부정적 의미를 달게 된 것이다. 야단법석은 대중포교의 중요수단이 돼 왔다. 야외에 수많은 스님과 사람들이 모여 법담을 나누니 왁자지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거기서 야단법석이 조롱의 대상이 되는 의미로 변질된 것이다.
조계종이 분규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수행과 화합의 공동체로 거듭날 길은 없는가. 「사찰재정의 투명성」 「종단운영의 수행·포교중심 체제로의 전환」. 불자들의 염원이다. 분규의 씨앗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교구본사(24개)나 문화재관람료 징수사찰(관광사찰·64개) 등 이른바 노른자위 사찰의 주지가 되기 위해 스님들이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 실력자들에게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불자들은 없을 겁니다』 『불자들의 정재(淨財)는 수행 포교 교육에 쓰여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주지 등 몇몇 간부스님들이 사찰재정운용에 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사찰재정을 신도회나 회계전문가에 의뢰해 투명하게 쓰이도록 한다면 총무원장선출이나 주지임명을 놓고 분규가 빚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신행단체의 회장이 한숨을 내쉬며 들려준 말이다.
출가자는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게 본분이다. 종단은 그런 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규제해야 한다. 그런데도 현행 종헌·종법은 종무행정 중심으로 짜여 있어 출가자들이 본분을 잊고 주지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불자들은 지적한다. 시쳇말로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을 둔다는 한탄이다.
5년전 열반한 성철(性徹) 스님에 얽힌 일화다. 54년 정화운동 당시 경남 통영에 토굴을 짓고 수행하던 스님에게 도반인 청담(淸潭) 스님이 찾아와 정화운동동참을 요청했다. 성철 스님은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절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는데만 힘쓰자. 그렇지 않고 절뺏기식의 정화를 한다면 묵은 도둑을 몰아내고 새 도둑을 만드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이든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면 묶이게 된다. 세속의 길은 묶이는 것이고 깨침의 길은 속박을 풀어버리고 훨훨 날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평범한 진리를 스님네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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