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은 일본을 국빈방문하여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의 합의사항을 공동선언문 형태로 명문화하였다. 江주석의 이번 방문은 중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최초의 공식방일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 2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의 성격도 지닌 것으로 내외의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다.최근 동북아의 강대국들은 앞다투어 이국간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화려한 형용사를 수반한 파트너십 관계를 경쟁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가히 동북아 지역의 이국간 정상회담의 시리즈라 할 만하다. 6월 클린턴 대통령의 베이징(北京)방문으로 시작된 정상회담 시리즈는 11월 오부치 총리의 러시아방문과 클린턴 대통령의 일본, 한국방문 그리고 江주석의 러시아방문에 이은 금번 방일로 일단락되는 것같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도 6월 미국에 이어 일본, 중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다.
이러한 정상회담의 빈번한 개최는 냉전종결이후 여전히 불확실성을 노정하고 있는 동북아 지역질서의 새로운 틀짜기를 위한 각국 나름의 모색 과정으로 이해된다. 탈냉전이후 동북아 4대국은 미소대결과 중소분쟁이라는 대립축을 기본으로 하던 냉전시대의 적대적 세력균형을 완전히 탈피하여 상호간의 동맹이나 동반자 관계라는 이국간 협력축을 중심으로 평화적 세력균형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새판짜기 과정은 지극히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한편에선 국익을 둘러싼 각국의 갈등이 첨예하게 표출되고 있기도 하다.
탈냉전이후 동북아의 새로운 세력균형 모색은 러시아가 내부의 혼란으로 기력을 상실한 와중에서 미국과 중국이 이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특유의 균형감을 유지하며 수세적 차원의 실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일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냉전종결이후 한층 강화한 미국과의 군사동맹 체제를 수용하고 가이드라인의 개정을 통해 한반도를 포함한 주변지역의 유사시 적극적인 대미 후방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하는 등 대미동맹노선에 박차를 가해왔다. 그러나 6월의 미중 정상회담에서 나타난 이례적인 미국의 중국 중시 태도에 일본은 적지않은 놀라움과 소외감을 맛보아야 했다.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한 대일책임론 공세를 퍼붓고 있는 미국과 위안화의 평가절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중국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한 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다소의 고립감과 우려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러일 정상회담에 이은 이번 중일 정상회담은 미국과 중국 이극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 동북아의 세력균형 구도를 견제하기 위한 일본 나름의 고육책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그 동안 소홀하게 다루어 왔던 유라시아대륙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 공략으로도 이해된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외교에는 넘어야 할 걸림돌이 놓여 있다. 일본은 러시아와는 북방 4개 도서에 대한 영유권분쟁을, 중국과는 과거 침략의 역사라는 무거운 부담을 안고 있다. 이번 중일 정상회담에서도 일본은 과거사의 부담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중국측은 공동선언문에 침략에 대한 사죄의 명문화를 집요하게 요구했으나 이것이 좌절되자 江주석은 공동선언문 서명거부라는 초강수로 일침을 가하였다. 일본이 동북아의 4국간 세력균형 게임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일본은 침략의 역사와 철저하지 못한 전후처리에 대한 비용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국제지역학부>국제지역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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