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단의 원로 천경자(千境子)씨가 자신의 그림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는 소식은 모처럼 IMF 경제난의 우울을 떨쳐내는 반가운 소식이다. 기증 작품에는 그가 가장 아끼던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여인의 시」같은 자화상과, 젊은 시절 그를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뱀 그림 「생태」등 대표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림을 넘길 때 작가가 『이 작품들만은 끝까지 간직하려 했는데…』라면서 눈물을 떨궜다는 대목은 그 작품들에 대한 그의 애착을 말해준다.서울시는 전달받은 작품을 현 시립미술관(옛 서울고 교사)에 보관했다가 중구 서소문동 옛 대법원 건물을 고쳐 2000년말 문을 열게 될 새 미술관의 특별전시실에 상설전시하기로 했다. 채색화가 주종을 이루는 그의 그림은 여인과 누드·가족·뱀·꽃·나비·초원의 동물들과 마릴린 먼로 등 여자배우가 주요 소재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그의 작품은 생산량은 적은데 미술애호가들로부터 대단한 인기가 있다. 그가 종종 가짜 그림 소동으로 고통을 겪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93점을 굳이 가격으로 계산해 보면 70억원대로 알려지고 있으나 작가는 그림에 대한 저작권까지 넘겼다.
천씨의 그림 기증은 시민과 후학들이 매력적이고 개성있는 그의 채색화를 언제든지 보고 즐기고 배울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울시는 서울 뿐 아니라 그의 고향인 광주나 부산 대구 등에서도 순회전이 열리도록 협조하여 지역민들과 문화적 기쁨을 나누었으면 한다. 이번 기증은 또한 미술사교육에서 취약지대처럼 남아있는 근대미술 부분을 실물로 보완해 주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천씨의 미술은 근대미술을 거쳐 현대미술로 넘어오는 궤적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대미술 중심의 여러 박물관과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운영하면서 국민교양과 미술교육의 현장으로 삼고 있으나, 지금까지 근대미술관을 갖지 못하는 중대한 허점이 있었다. 천씨의 작품기증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크게 기여하는 셈이다. 다음달 1일부터 덕수궁 석조전 서관에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유일한 근대미술 상설전시장으로 개관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다행스런 일이다. 서울도 이러한데 각 지역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천씨의 이번 기증이 전국에서 활동하는 주요 작가들로 하여금 그 지역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면, 너무 큰 희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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