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짜라도 달러주면 판다/국부유출·헐값매각 우려속 대상 라이신사업·OB맥주 등 10월까지 55억달러 이상 팔려/“5대재벌 적극자세 보이고 규제 아직 더풀어야” 지적도「마누라와 자식빼고 다 팔아라, 달러가 최고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들어선 이후 우리 경제는 「외화벌이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대해진 군살을 빼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 구조조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리고 외환보유고를 늘려 제2의 외환위기를 막기 위해서도 외국자본유치는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산이나 지분매각을 통한 외자유치의 물꼬는 올 3월 대상이 6억달러를 받고 라이신사업을 독일 바스프사에 넘기면서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IMF체제이후 지난달말까지 우리기업이 자산을 팔거나 경영권을 팔아 마련한 돈은 55억3,000만달러. 3,000만달러 이상의 거액이 들어온 건수만 37건에 금액은 35억6,700만달러에 이른다. 한라펄프 신호제지 E마트 OB맥주 한국마크로 한화기계같은 기업들이 통째로 혹은 지분인수를 통해 외국으로 팔려갔다. 현재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것만 해도 금호타이어, 만도기계, 한라중공업, LG와 삼성전자의 백색가전부문, 포항제철 한국중공업 한국전력 등 공기업 지분 등 줄잡아 100억달러어치 이상이 될 것으로 M&A업계 관계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기업의 해외매각이 활발해지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몽땅 외국에 팔려나가고 국내에는 껍데기만 남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까운 것은 뒤로 돌려두고 별 볼일없는 것만 내놓는 식의 시늉만으로 넘어가기에는 IMF의 파고가 너무 높은 것이 현실이다. OB맥주 지분 50.7%를 벨기에 인터브루사에 매각한 두산그룹의 박용오(朴容旿) 회장은 『나에게 쓰레기는 남에게도 쓰레기라는 자세로 외자유치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자유치시장은 팔려는 측은 생사가 달려있고 사려는 측은 느긋한 「바이어스 마켓(Buyer’s Market)」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내 기업들은 값을 후려치고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는 외국자본의 무리한 요구에 속을 태우고 있다. 본사건물을 싱가포르의 공공기업에 매각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는 S기업 관계자는 『매각가격에는 어느정도 의견이 좁혀졌지만 5년간 임대료 수입을 보장하는 것을 계약내용에 포함시키자고 하는 바람에 최종타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이처럼 알짜배기 국내기업을 싼 값에 사들일 기회를 노리고 몰려든 국제 기업사냥꾼들로 국내 특급호텔은 북적이고 있다. 또 외자유치발표가 기업퇴출이나 주가향방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면서 그럴듯한 회사이름을 내걸고 외자유치조인식 행사를 치러주겠다며 돈을 요구하는 국제사기꾼까지 등장했다는게 업계관계자들의 말이다. 반대로 외자유치를 미끼로 접근하는 이런 사기꾼들을 가려주는 업체까지 등장하는 웃지못할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외자유치전쟁에도 낮잠을 자고 있는 병사들은 있다. 바로 5대그룹이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달까지 5대재벌이 자산매각이나 지분매각을 통해 3,000만달러 이상의 외자를 유치한 건수는 불과 2건. 삼성중공업이 7억5,000만달러를 받고 스웨덴의 볼보사에 중장비부문을 매각키로 한 것과 LG텔레콤이 3억9,700만달러의 가격에 지분 23.5%를 영국 BT에 넘기기로 한 것이 전부다. 이병기(李丙基) 한국경제연구원 전문위원은 『기업들이 여전히 경영권방어에 집착, 외자유치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데다,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법·제도상의 난점들이 많이 남아 있어 외자유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최근 외국인투자유치정책의 문제점을 20여개 항목으로 분류, 관계부처에 대책수립을 촉구하기도 했다. 감사원은 공장설립승인절차가 여전히 복잡하고 수도권지역의 공장신·증설 및 이전이 제한돼 있는 점을 대표적인 외자유치 걸림돌로 지적했다. 또 외국인투자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인 시각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구체적인 홍보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M&A업계 관계자들은 이밖에도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업종별로 회계처리기준이 제각각이어서 재무제표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국내기업에 대한 직접투자를 꺼리고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김준형 기자>김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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