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잃을라” 노동운동 자제/정리해고·휴폐업으로 1년새 128만명 실직/고용불안에 생존자도 감봉·업무과중 감수/양노총 “勞만 희생” 반발 경제현실앞 무기력『퇴출된 사람도, 살아 남은 사람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마찬가지다』
IMF 이후 1년은 근로자들에게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다. 생산직 사무직 할 것없이 봉급쟁이는 예외없이 회사의 파산과 정리해고, 명예퇴직의 악몽에 시달리면서 실직의 벼랑끝으로 내몰렸다.
실직자는 굳게 닫힌 재취업의 문 앞에서 좌절했고 용케 살아남은 근로자들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보너스반납서류에 서명을 강요당해도 「미운 털이 박힐까」침묵하고, 네가 아니면 내가 쫓겨나는 살벌한 직장분위기에 주눅 들어 어깨는 더욱 처졌다.
예년 같으면 임금인상률과 근로조건을 놓고 실랑이 하면서도 비교적 느긋하게 노사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노조도 올해는 경제위기와 정리해고라는 양 칼날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노조는 조직률과 교섭력이 동반 하락하면서 움츠러들었고 노동자와 노조의 위축은 노동운동 전체의 침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한국경제의 몰락이 곧바로 노동운동의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고용불안과 나빠지는 근로조건
9월 현재 실업자는 157만2,000명. IMF위기 직전인 지난해 10월보다 3배나 늘어났다. 이중 128만4,000명은 직장을 잃은 지 1년이 안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이들 중 스스로 퇴직한 사람은 24%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회사경영악화(35.9%), 정리해고 및 명예퇴직(18.8%), 직장의 휴·폐업(13.7%) 등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퇴직한 말그대로 「IMF실직자」다.
취업자 중에도 17만5,000명의 일시휴직자와 주(週) 18시간 미만 일하는 사람 중 추가취업을 희망하는 20만3,000명은 사실상 실업상태나 다름없다. 이들을 포함하면 정부통계로도 실업자는 200만명을 넘어선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실업자수가 내년 상반기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점이다. 조심스런 낙관론을 펴는 정부기관 조차 이를 수긍하고 있을만큼 실업문제는 비관적이다. 실업자가 계속 는다는 것은 한계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고용불안이 더 심화한다는 얘기다.
도산한 기업은 물론, 비교적 건실한 기업의 노동자까지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으나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강성노조가 있었던 현대자동차, 만도기계 등의 노조가 정리해고에 파업으로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실직자는 이미 가정파탄 지경에 이르렀지만 남은 노동자 역시 감봉과 수당없는 연장근무, 복지혜택 감소로 생활고를 겪기는 마찬가지다. 7월을 기준으로 전년동기대비 실질임금은 12.4% 떨어졌고 자진반납 등 감춰진 삭감폭을 감안하면 체감 임금삭감률은 30%를 웃돈다는게 노동계의 주장이다.
■노동운동
근로자들이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지만 노동운동은 경제위기라는 현실에 짓눌려 엉거주춤 표류하고있다. 양대 노총은 올 상반기 내내 「노동자의 희생만을 전제로 한 위기탈출방식은 수용할 수 없다」며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전개했지만 노사정위에서 합의한 사안을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7월부터는 노사정 3자의 균등한 고통분담을 내걸고 시민단체등과 연계해 기업구조개혁 등 사회개혁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는 별로 없다.
노동계는 일단 비난의 화살을 노사정위에 돌리고있다. 노사정위가 결정한 사안 중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 정리해고제 도입등은 바로 시행하면서 정작 재벌과 정부부문의 개혁은 흐지부지 하고있다는 성토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노동계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어떻게 위기를 타개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보다 노사정위를 탈퇴하느냐 마느냐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양대 노총이 사상 초유의 조직적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서도 노동운동의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지난해 말 115만명이던 조합원이 지금은 100만명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역시 지난해 5월 52만5,324명이던 조합원이 8월 현재 50만8,200명으로 감소했다. 도산에 따른 조합원 수의 감소 이상으로 정리해고제 도입과 파견근로제 수용에 따른 정규직 감소가 노동운동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양대 노총은 상근직원의 임금지급도 애를 먹을 정도로 자금난을 겪고 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심리적 위축과 패배의식의 확산이다. 한국노총의 한 간부는 『기업의 잇단 도산과 정리해고로 조직률과 임금이 같이 떨어지면서 노동자의 패배의식도 확산되고있다』며『적극적으로 활동한 조합원이 먼저 정리해고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노동자의 무기력증이 확산되면서 노동운동이 심하게 위축되고 있지만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이동국 기자>이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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